이치조 미사키
무난한 책
남주 가미야는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 초면인 여주 가오리에게 고백하고,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말라는 이상한 조건을 걸고 가오리는 고백을 받아준다. 가미야는 가오리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지만 그녀는 선행성 기억상실증, 즉 잠을 자고 나면 하루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는 병을 앓고 있었다. 매일 아침 전날 적어둔 일기를 보며 병에 안 걸린 사람인양 행세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미야는 그녀에게 행복한 기억만을 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설정 말고는 이 스토리만의 특징이 있는지 모르겠고 그 설정마저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가오리는 놀랍게도 하루마다 기억이 지워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침마다 일기를 읽으며 정상인인 척 행동한다. 정말 경이로운 기억력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상황을 파악하는데만 반나절은 썼을 것이다. 그녀는 방 안에 붙어있는 메모만으로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고 일기를 읽으며 대책을 세운 뒤 등교하기 까지 채 3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녀의 놀라운 정신력에 박수를.
작가도 이 부분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아는지 종종 가오리의 시점으로 서술하며 그녀의 암담한 심정을 보여준다. 의도는 이해가 가나 공감은 되지 않는다. 병의 무게에 비해 가오리의 절망이 한없이 가벼운 느낌이다. 소중한 기억이 매일마다 사라진다는 건 '그녀는 이 정도로 정신력이 강해요' 정도론 납득시킬 수 없는 악랄한 병인 것이다. 그러니 남주의 헌신으로 암담한 상황을 극복한다라는 상황이 나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브레이크가 걸린다. '그래, 그렇다 치자' 하고 넘겨 읽다 보면 어느새 '그래, 그렇다 치자'하고 끝나있다.
가미야와 가오리 모두 일본 특유의 캐릭터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걸렸다. 가오리는 꼬박꼬박 가미야를 남자친구'님'이라 부르고 여린 부분을 감추려 일부러 더 쾌활하게 행동한다. 실컷 즐기고 허물어진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우면서 자신을 무장해제 시킨 주인공이 점점 더 좋아진다. 그녀의 눈에는 가미야는 남들과 다르게 상냥해서 의지가 되고 그를 생각하면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 참고로 그녀는 매일 기억이 리셋되는 병을 앓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성격의 주인공이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빼버리면 그녀만의 특징이 남아 있을까?
남주 가미야 또한 마찬가지다.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상냥하다. 시크한 모습에 주변인들은 그의 진가를 몰라보다가 어떤 계기로 그와 엮이게 되면 그의 상냥함에 빠져버린다. 잘하는 건 딱히 없지만 행동에는 자신감과 그 만의 철학이 있다. 이 역시 어디서 많이 본 성격이다. 하도 많이 봐서 책을 덮으면 '주인공이 누구였지?'하고 휘발되어 버리는 그런 성격이다.
누군가를 안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나의 머릿속에서 유일하게 그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다. 기억이 없다면 나에게 있어서 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기억이 없으면 사랑 또한 없다. 사랑도 대상과의 기억 속에 피어난다. 그러니 기억상실증이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결말에 다다를수록 슬픔이 솟구쳤다. 하지만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꼬집어서 눈물 안 흘릴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좀 만 더 신경썼으면 더 슬프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다 읽고 나면 울적한 마음에 에필로그 부분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게된다. 추억은 내 머리속에만 존재한다. 바깥에 있는 것들은 모두 추억의 트리거 역할만 할 뿐 그 자체로 추억이 되진 않는다. 그러니 그를 기억해 내는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그녀에게는 가미야를 기억해내는게 아니라 창조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기적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가미야에 대한 기억이 한 줌이라도 남아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