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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쁜 토끼 Dec 29. 2022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소설로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에 당당히 이름 올릴 만큼 그 방면으로 유명하다. 조지 오웰의 '1984'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두 작가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사뭇 결이 다르다. 조지 오웰이 통제와 억압으로 점철된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면, 올더스 헉슬리는 1946년판 머리글에서 밝히듯 어찌 보면 유토피아로 보이는 역설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려냈다. '1984'의 디스토피아에서 생명 과학 기술의 발달로 생각까지 극한으로 통제해낸 좀 더 비현실적인 사회가 '멋진 신세계'의 디스토피아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전체주의 사회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심심치 않게 섬뜩한 부분이 튀어나오지만, 그중 가장 압권은 책의 종장 부분 야만인 존이 등대에서 겪게 되는 사건이다. 이 부분의 공포가 유독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책의 막바지에 펼쳐지는 이 사건에서의 공포의 근원이 이전 것과는 반대의 결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꽤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주제의식을 곧잘 따라가던 독자의 머릿속은 뒤엉켜 버린다.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눌 수 있다. 결국 맥거핀이라 할 수 있는 버나드 마르크스의 시점을 따라가는 전반부와 야만인 존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후반부로 책이 구성되며 그 둘의 분위기도 확연히 차이 난다. 책의 전반부는 '멋진 신세계'만의 사회를 묘사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량 생산 컨베이어 벨트의 아버지 헨리 포드가 포드 모델 T를 생산한 날을 기점으로 연도를 센다. 이들 미래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성이며 그것이야 말로 인류가 추구해나가야 할 길이며 최종 도착지이다. 그들의 행동양식과 발전방향은 모두 공동체의 안정에 맞닿아 있다. 이를 위해 불필요한 유전자는 조작으로 잘라내고, 불필요한 자아 형성 역시 세뇌와 약물, 놀잇거리 제공으로 통제한다. 인간은 각자의 위치에서 행복하며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자체가 삶의 목표이자 존재의의이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전체주의인 것이다. '멋진 신세계'에서의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큰 유기체를 구성하는 세포와 같다.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으며 중요도 또한 다르다. 하지만 하찮은 세포라고 불평할 것도 없다. 어찌 됐건 거대한 유기체를 유지하기 위해 일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그것에서 희열을 느끼도록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암세포의 발생은 사전에 통제되며 단일 세포가 고장이 나는 것 또한 용납되지 않는다. 참 멋진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모두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살아가는 사회이지 않은가.


버나드와 야만인 존은 이런 유토피아적인 디스토피아를 독자의 시점에서 관찰하고 체험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버나드는 결국 디스토피아에 속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적어도 1부에서는 비교적 정상인의 축에 속하는 것이다. 1부에서 가장 압권인 부분은 3장으로 레니나, 버나드, 무스타파 몬드의 각각의 발화를 점점 짧게 교차로 보여주어 독자는 긴장감이 고조되고 동시에 디스토피아의 마수에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디스토피아에 절여진 인간들의 비정상적인 대화 속에 문제아 취급을 받는 그나마 정상에 가까운 버나드의 투정이 파묻히면서 독자들은 도무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래서 버나드가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간다고 할 때, 독자들은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버나드를 응원하게 된다.


이 버나드는 야만인 존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우는 본인의 역할을 완수하고 철저하게 사라진다. 버나드의 친구 헬름홀츠 또한 마찬가지이다. 헬름홀츠는 버나드와는 정반대인 이유로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는 인물로, 태생의 한계로 비뚤어진 버나드와는 달리 너무 완벽해서 비뚤어진 인간이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 둘은 같은 위치에 있다. 저자는 디스토피아와 친하지 않은 둘을 설정하고 디스토피아의 사상을 전복시킬듯한 인물로 묘사한다. 그러다가 결국 이 둘도 디스토피아에 세뇌된 어쩔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독자의 희망이 무색하리만큼 '멋진 신세계'가 단단하다는 것과, 왜 이 세상이 진짜 디스토피아인지를 보여준다.


독자는 관찰자의 위치에서 버나드를 통해 디스토피아 내로 들어가게 되며 다시 야만인 존으로 시점이 옮겨가면서 결국 종장을 맞이하게 된다. 처음에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디스토피아의 우울함을 관망하던 독자들은 이 순간 야만인 존의 시점을 통해 디스토피아 내부로 직접 들어오게 된다. 이때 독자들은 자신이 정상인이 아니라 사실 이 멋진 신세계의 암세포였음을 깨닫게 된다. 현실의 가치관으로 디스토피아를 비판하던 독자가 종장에 다다르니 어느 순간 복제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유희거리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마치 연극을 관람하던 관객에게 무대 위의 배우들이 일제히 제4의 벽을 뚫고 맹렬한 비난의 시선을 보내는 것과 같다. 분명 이야기의 초반 복제인간들에게 보냈던 비웃음이 어느새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복제인간들의 웃음을 통해 이 섬뜩함은 배가된다.


결국 체제가 깨어질 여지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 공동체가 유지되어온 이유이며 그렇기에 디스토피아라 불리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그 자체로 완성이며 도착지이다. 발전도 없고 변화도 없다. 그래서 전복도 없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야말로 공동체를 해치는 암세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가 말했듯 이 신세계는 가장 유토피아적인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 가지 더 무서운 점은, 이 디스토피아가 막연히 절망적이고 무서운 사회를 지향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디스토피아는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하면 안정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발전적인 물음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책의 종반부에 나오는 무스타파 몬드와의 대화를 듣다 보면 어느새 그 논리에 설득당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자유와 안정에서의 선택은 비단 현실에서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발전사 역시 자유와 평등 간의 대립이었고 그 둘은 적절한 선에서 균형을 맞춰야만 의미가 있다. '멋진 신세계'처럼 한쪽에 극단적으로 치중하기 위해 다른 한쪽을 철저하게 배격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유토피아적인 디스토피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안들에는 대개 이러한 양면성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은 자유냐 평등이냐, 생명권이냐 선택권이냐, 실용이냐 가치냐와 같은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취사선택이 밑바탕에 깔려있으며 그 누구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 극단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말 그대로 이상일뿐이며 반대자들은 뭣도 모르는, 사회를 좀먹는 분탕이 아니라 다른 기호를 가진 개인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 입장이 중도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나 따지는 척도를 삶을 통해 내재해야 하며 끊임없이 갱신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나는 특정 당의 열성당원이, 꼰대가, 그 속에 담긴 정치철학적 함의도 모르고 마냥 여론에 휩쓸려 의견을 정하는 무지렁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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