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자식이 기억하는 것
아이가 곧 태어나려 합니다. 너무 늦은 나이에 보는 아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저한테 문제가 있기에 늦어졌고 이것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가 될 것입니다.
아기 이름을 아직도 정하지 못하여 이런저런 의견도 받고 나름 생각도 해보는데 다른 이민자 가정에서 하듯이 Grace Eun-Hye Lee 이런 식으로 굳이 middle name을 한글로 넣어 복잡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노인네들은 어떻게 던 이름에 한글을 넣어야 우리 아이가 호주에 살면서도 한국 혼魂을 가지게 된다고 믿기에 그러는 모양인데 제 지난 글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귀신이나 심령, 영혼, 인격식 따위를 대하는 제 태도에 비추어 그딴 것은 크게 의미 없겠습니다.
더구나 제 성씨가 유별나기에 대신 아내 집안 성을 아이에게 주자고 우기는 중인데 이 일로 아버지랑 또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애 이름에 왜 아버지 성을 빼 인마!"
"우리 집안 성씨가 호주에서는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호주 사람들에게 기괴한 발음이라 이걸 굳이 고집해서 학창 시절 내내 아이에게 시달림을 주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이겠어요?"
아무리 설득하고 이곳 상황을 말씀드려 봐야 소 귀에 인간 기표를 전달하는 느낌입니다. 물론 아버지 세대 특수성을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며 아버지 개인 서사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우리 집안 성씨는 보물이랑 같은 것입니다. 청년시절 집안이 풍비 박살 나서 졸지에 장남 된 죄로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할머니랑 금호동 단칸방 시절을 경험하며 처절하게 살았던 시간을 대략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결국 학업도 포기했고 고된 청년 가장으로 어찌 사셨을까 측은합니다.
그러던 아버지는 북에서 내려온 같은 성씨를 가진 사채업자 할머니 아래서 일을 하게 됩니다. 가족이 없던 할머니는 그 불안감을 돈으로 해소하셨는지 재벌 총수들이 현금을 융통하려 수시로 문간을 드나들던 큰 손이라고 했습니다.
똘똘하게 생기고 실제로도 영민했던 아버지는 가족이 없던 할머니에게는 흔치않은 성씨도 같으니 아들 같은 존재였고 그때 받은 총애랑 충분한 급여로 집안이 일어서게 되었다니 아버지는 평생에 이 일을 기억하고 길 가다 마주치는 종친이면 생면부지라도 지갑을 털어주는 정도로 애착을 보입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성씨에 관련해서 이런 서사가 있는 아버지에게는 지금 제가 하는 행동이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철딱서니 없다 못해 조상신들에게 죄를 받을, 제사상에서 면목이 없다고 할 뭐 이런 사건이겠죠. 그것도 이해합니다.
"아버지, 아이에게 부모가 물려줄 것이 무언가요? 돈인가? 우린 돈도 없지만 사랑하는 마음 아닐까요? 이름도 중요하겠지만 지금 돌이켜 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존경하는 그들 이름이 뭔지 성이 뭔지는 내게 중요치 않아요. 그 사람이 내게 베풀었던 따스한 말, 행동만이 남잖아요. 개 패듯 패고 애를 막대하면서 왕후장상 성을 만들어 주면 뭐 합니까? 그게 아이에게 남겠습니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소리가 나오냐. 매 한번 든 적 없고 금이야 옥이야 키워 놨더니 이 자식이 한다는 소리가.."
또 급발진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우리 부자 대화는 매번 이런 식입니다. 서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합니다.
우리말은 성을 먼저 내세웁니다. 정우성, 이바른나라, 최박지혜 아무리 튜닝을 하고 기발하게 뭘 지어내도 성이 맨 앞에 오는 순서는 바꾸지 못합니다. 반면 호주는 성이 뒤에 옵니다. Kevin Kim, Jean Park.
이 역시도 관계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 우리 언어 습관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이야 성이 큰 의미가 없지만 예전에는 성도 계층을 나누는 기표였습니다. 어디 김 씨가 양반 가문이고 어디 최 씨는 왕친척이며 어느 박 씨는 벼슬을 했고 반면에 천/방/지/축/마/골/피는 양반이 아니니 누군가를 처음 보았을 때 통성명을 하면서 성만 꺼내도 내가 어느 계층인지 상대에게 어떤 언어층을 선택해서 구사해야 하는지 계산이 끝납니다.
양반 성씨면 기가 확 서는 것이고 천민 성이면 코가 쑥 빠지겠지요.
이런 문화, 이런 존대 구조는 지나간 옛일도 아니며 여권 만들 때나 사용하는 행정 사항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무의식까지 구성하며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는 운명을 가르는 열쇠가 됩니다. 지금도 작명소가 있고 이름 한자에 물이 많으면 태어난 시랑 비교해서 궁합을 보는 따위를 하지요. 정말 내 사주에 불이 많으면 이름에 물 수변을 넣어 중화시킴으로써 뭐가 달라질까요? 재미있는 환유 놀이로 보입니다. 미역국 먹으면 미끄러져 시험에 떨어진다는 수사학 논리죠.
이렇게 종교를 폄하하고 이미 우리 무의식을 구성하는 언어에 있는 오류를 찾아내 조롱하는 저 같은 놈이다 보니 읽는 사람들이 많이 불편해합니다. 각 문화에 맞게 옷을 입은 무서운 귀신도 있고 완벽하다면서 굳이 우리를 닮으신 인격신도 날아다니는 세상인데 나 혼자 그런 것을 무의식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들 달라질 것이 있나요.
그래서 비겁하지만 실명 대신에 필명을 씁니다. 괜한 시빗거리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제가 이런 불경한 글을 쓰는 것을 우리 집안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아버지는 폭군으로 어머니는 자기애 성격자로 동생은 우울증자로 묘사하는 이런 글을 시장은 반길까요? 제가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를 가족들, 정말 친한 주변인들은 모릅니다.
그렇다 보니 저는 더욱 사람을 멀리합니다. 개랑 이야기를 하고 고양이랑 친구 하려 합니다.
부모님 하고도 언성이 높아지면 불연 미친놈처럼 옆집에 사는 강아지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 녀석을 본 적도 없는 부모님은 갑자기 싸우다 말고 이게 뭔 개소리인가 합니다.
루나가 얼마나 날 잘 따르는지 덩치 큰 녀석이 얼마나 애교가 많고 집중력도 좋아서 공 가지고 하는 훈련도 척척 따른다는 칭찬을 꺼냅니다. 또 대화가 끊어집니다.
나는 지금 내가 맞다고 생각하기에 더 큰 문제입니다. 부모나 형제랑 이렇게 사이가 좋지 못한 내가 태어날 아이랑 과연 사이가 좋을까 상상해 봅니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여기서 태어나 호주 교육을 받고 자신이 호주 사람이라고 생각할 그 아이에게 나는 물려줄 것도 별로 없으며 대화는 더욱 막힐 것입니다.
지나친 걱정이지만 나중에 이 아이가 결혼할 상대로 노랑머리 호주 사람을 데리고 오면 그 친구랑은 더욱 끔찍한 관계가 설정이 되겠지요. 결국 내가 지금 아버지를 증오하는 마음만 아이에게 그대로 유산이 될 것 같습니다.
가족이 늘어나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는 기쁜 일도 제가 글로 쓰면 이렇게 어둡게 되는군요. 아마 늦은 나이에 아이를 얻은 대부분 아빠들은 '널 위해 내가 죽고, 네 평생을 내가 지켜주며, 세상없는 것도 구해다 주마'하며 기세가 등등할 이 시기에 이런 글을 작가님들께 올립니다.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보편적인 신념을 해체하는 시도를 보여주시다 보니,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아버지' 혹은 '어머니'란 단어에 담긴 무의식적 풍경은 켜켜이 먼지가 쌓여있는 책장같이 느껴집니다. 뭔가 그곳에 좋은 것이 있을 것 같으면서도, 가까이 다가가도 뿌옇게 보여지지 않는 무언가가 가리고 있는... 공개되지 못한, 과감히 펼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펼쳐주셔서 늘 감사드려요. '팔리지 않는다'라고 속상해하시는 것 같아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습니다. by양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