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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에게 Aug 07. 2023

철학

002

왜 철학과를 가고 싶었는지부터 말해봐.


학창시절에 선생님이 한 명이 오신 거야. 그래서 그런 철학과 인문학적인 수업을 했던 적이 있거든. 근데 나는 그게 되게 멋있어 보인다 생각했어. 트롤리 딜레마나 이런 걸 설명해 주셨던 거 같아. 보통 우리가 이런 행위는 하면 안 된다, 된다 하는 것들이 굉장히 모호하게 머리 속에 있잖아. 근데 그런 것들을 이론적으로 논증의 방식으로 정립하려고 한다라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거 같아.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렸어. 수업 듣고 관심이 생겼는데 철학과 가려면 어떤 걸 준비해야 되냐 이런 것들. 입문용 책을 막 추천해주셔서 읽고 그랬어.


응응.


내가 예전에 그런 얘기했었잖아. 내가 만약에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갖게 된다면, 내 인생은 모든 경우의 수가 배드 엔딩일 것 같아서 우울감도 들었다고. 그게 그때쯤이었던 거 같아. 철학을 배워서 그런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책을 읽으면서 운명론 이런 것도 접하고 그런 생각까지 해보게 된 거지.


맞아, 근데 철학 관련 책들을 읽으면 그런 게 있어. 읽을수록 비관적이어지는 거 같아.


응, 오늘 읽은 책도 철학책이었다며.


맞아, 나는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쓴 명상록이라는 책이 있는데, 원래 황제가 일기처럼 쓴 건데 전해지고 전해지다 현대까지 읽히게 되는 책인데. 로마시대는 보통 스토아학파잖아. 보통 다들 금욕을 중시하고 자기 통제하는 사람들이 깨달은 것에 대해서 쓴 건데 이게 이제 현대 사람들한테 울림을 주는 거지. 격언같은, 탈무드 같은 그런 느낌의 책이거든. 근데 오늘 읽은 거는 황제가 쓴 명상록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주는 책이야. 모호하게 쓰는 거 있잖아. 지금 철학책들이 다 고전으로 읽히는 거 보면 지금 나의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는 문장들이잖아. 돌려 얘기하다보니까 내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는 글들인데, 개인적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 매력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근데 이 책의 저자는 그 배경을 알아야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라는 느낌으로 배경을 설명해주는 책이었어. 나도 그 명상록이라는 책을 좋아하거든.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랑 비슷한데, 한 문장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부정적인 상황에 처해 있으면 무슨 문장이든 다 부정적으로 읽히잖아. 그게 철학의 매력이라고 생각해. 모호한 문장들의 내용이 다 그런 느낌을 주거든.


응응.


내가 인생책이라고 꼽는 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인데 그걸 읽고 인간이 정말 악하다고 생각했거든. 성악설을 정말 확신한 계기가 되었고 우린 어떤 시스템 안에 들어와 있기에 선하게 살 수 있는 건데 시스템 자체가 악해져버리면 우리는 다 악해질 수 있다는 얘기거든. 2차 세계대전 때 사람들은 다 본인의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잖아. 예를 들어 그냥 열차 기관사는 열차 운전을 해야 하니까 했을 뿐인데 그게 알고 보니까 뒤에 포로들을 끌고 가는 창고 같은 개념이잖아. 사실 포로들을 향한 억압에 동참하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시스템이 뭔지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걸 나의 가치관으로 삼아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도와주는 게 철학이라고 생각해서 철학과에 가고 싶었어.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행위인 거지. 인간이라면 계속 철학적으로 사고해야 하니까. 나도 나름 세계평화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거든. 사실 출판사에 가고 싶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고. 책을 읽기 전이랑 후는 다른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나 자신이 신기했고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면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해서 책을 읽게 하는 마케터가 돼야겠다 생각한 거지. 내가 생각하는 철학까지 얘기해버렸네.


멋있다.


멋있었지? 멋있었어.


(웃음) 아, 스스로 뿌듯해하는 거야?


응.


그치, 그럴 수 있지.


근데 당시엔 그랬는데, 지금은 막상 현실 속에 들어오니까 시스템이고 뭐고 모르겠어. 그 시스템이 정말 악한 것이라고 해도 내가 거기에 반기를 들 용기가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긴 해. 당시에는 내가 살짝 오만했던 거 같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면서 그 사람들이 다 나쁘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 사람들 입장을 좀 이해하게 된 거 같아. 그래서 뭔가 내가 그렇게 모든 행동을 정의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싶었어. 정답은 알지만 그 사람들의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거고, 행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정말 몰랐던 사람들도 있을 거고. 근데 그런 세세한 사정은 지금의 내가 알 수 없는 거니까.


응응.


그러면서 생긴 내 좌우명이,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까지 갔어. 지금의 생각은 그래. 내가 그때 오만했다.


(웃음) 굉장히 서사적이었는데 그게 좌우명으로 굉장히 함축적으로 축약됐네.


맞아.


그 많은 스토리가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는 굉장히 어떻게 보면 간단한 문장으로 축약이 된다는 게 웃기다.


웃겨? 이거 굉장히 철학적인 좌우명인데.


맞아, 듣고 보니까 그런 거 같아.


이게 되게 좋아. 살면서 그런 거 있잖아. 사람들이 나한테 뭔가 기분 나쁜 행동을 할 때가 있거든. 그게 왜 기분이 나쁠까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가잖아. 화가 나는 이유도 상대방이 나에게 왜 저렇게 행동하는 건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근데 그럴 때마다 어쨌든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한 걸 내 입장에서 함부로 판단한 거니까, 그걸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게 정말 가능해진다면 기분 나쁜 일도 없고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 아직은 아니긴 한데, 그렇게 나아가고 있어. 나아가려고 해.


(웃음) 언니는 나도 이해 못하잖아.


하려고 하고 있어.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철학은 뭐야?


내가 생각하는 철학... 오늘 뭔가 철학 수업을 해서 그런가. 그 방향대로 접근하게 되는 거 같긴 한데...


응.


나는 철학이... 내 판단을 도와주는 기본적인 근본 원리 같아. 근데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같은 큰 틀에서도 마찬가지지. 모든 게 돌아가는 근본 원리를 탐구하는 게 철학인 거 같거든. 그래서 보면 칼부림 사건들도, 우리는 악하다고 판단을 하잖아. 그러면 왜 악하다고 판단하는가. 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그럼 위법인 경우에 악하다고 판단하는 건가. 그러면 사회적으로 약속한 법에서만 어긋나지 않으면 우리는 악하다고 누군가를 비난할 자격이 없어지는 건가. 법이라는 건 사실 완벽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비도덕적인 사람도 감형을 받는다던가 잘 피해갈 수 있는 사회잖아. 때문에 법도 사실 완전히 도덕과 비도덕을 나눌 수 있는 잣대가 되진 않거든. 그러니까 결국 모든 것에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들이 필요하잖아. 만약에 내가 국가를 세운다고 한다면 그 국가에도 내가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시하는 최고선이 있는 거고. 그런 것들을 명확히 하는 게 서양 철학이라고 생각했었어.


응.


동양철학은 좀 다르긴 해. 동양 철학은 좀, 수양론이 중시되잖아. 개인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양이기 때문에 그건 굉장히 개별적인 판단 기준 같고. 개인이 해탈이든 도든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래서 나는 동양철학이 종교적인 느낌도 살짝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사실 내가 선호하는 건 서양철학이야. 기본적인 기준을 논증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철학이랑 맞닿는다고 생각했거든.


그럼 네가 생각하는 서양철학이 칸트야?


왜 칸트가 먼저 나왔어?


아니 도덕적인 거 말하길래.


아, 도덕적인 걸 말해서.


도덕 규범하면 칸트잖아.


근데 사실 나도 이거에 대해서 되게 딥하게 생각해본 건 아니어서. 근데 내가 생각하는 도덕이라는 게 의무론은 아닌 거 같아. 칸트가 길을 걸어가면 몇 시 몇 분인 줄 안다잖아. 굉장히 FM적인 사람이라고, 칸트는.


응응.


만약에 딜레마가 있다면 본인이 추구하는 도덕 규범에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 있어서도 같은 선택을 할 거란 말이야. 근데 사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렇게 기계적으로 살지는 못하잖아. 그래서 나는 그 후기에 의무론, 공리주의, 실존주의 이런 게 있다라고 한다면 실존주의에 가까운 거 같아. 보편적인 윤리보다는 상대적이고 내가 하는 선택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고. 인간은 무의 상태로 태어나는데 점차 선택으로써 뭔가를 만들어나가는 거라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어. 근데 사실 내가 철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럴 때는 시기가 안 좋다 보니까. 집이 그렇게 화목한 편도 아니었고. 그때는 내가 여자를 만난다는 것에 대한 스스로 부정적인 시각이 좀 있을 때였거든. 그래서 다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거지.  운명론과 합쳐지면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나는 불행하게 살게 될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런 맥락이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맞아.


그게 그거지? 나는 내가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을 하는 그런 건가.


맞아.


그 모든 선택들에 의해... 근데 이게 오히려 되게 긍정적으로 가는 게 맞지 않나? 어쨌든 내 선택에 의해서 내 실체를 계속 갖고 나간다는 느낌이잖아.


응, 그치.


근데 이게 어떻게 운명론으로 이어져?


그때 내가 생각한 게 뭐냐면... 그때 스스로 나는 되게 고집이 세다고 생각을 했어. 나는 내가 내 팔다리가 부러져도, 주위 사람들이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신념이 있으면 그걸 밀고 나가는 사람으로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실존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나한테 맞았던 거지. 그, 오상원의 <유예>라는 작품이 있어. 6.25 전쟁 때 이념의 대립 때문에 동족상잔의 아픔으로 폭력적인 행위를 일삼으면서 실존적 생각을 하는 인물을 담은 서사가 있거든. 인민군이 남한 사람을 잡아들이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남쪽으로 걸어가라.'고 하면서 그 뒤에서 총을 쏴서 죽이는 거야. 이념적인 대립이 담겨 있는 거지. '네 그 알량한 이념과 신념이라는 게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봐라. 그리고 그걸 후회해라.' 약간 이런 마음인 거지? 나는 그게 되게 잔인한 형벌이라고 생각을 했거든. 뭐, 형벌도 아니지. 잔인한 처사지. 근데 그 마지막 순간에 죽을 사람에게 '너는 지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냐'고 하니까 그 인물이 대답하는 게 지금 오히려 살아있는 것 같다고 얘기하는 거야. 기계나 도구가 아니라 생명으로 살아있다는 게 기쁘다고. 사실 누군가가 주위에서 압박을 해서 주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거잖아. 일제강점기면 친일 행위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거고 한국 전쟁에서도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굴복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거지. 근데 저 인물은 목숨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하잖아. 의지 있는 선택을 하는 거 자체가 선택이고 살이있는 거라고 느꼈거든. '이게 실존이다.' 근데 사실 그게 결말이 좋진 않잖아. 결국 죽음을 당하거든. 그래서 내가 주체적으로 살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질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게 너의 고집 때문이다?


응, 만약에 엄마가 막 '너 여자 만나지마. 헤어지지 않으면 집에서 나가야 돼.' 이런 겁박을 해. 그러면 나는 미성년자 신분으로 집에서 나와서 당장 잘 곳도 없어지는 거고,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어도 그걸 포기하고 일 해야 하는 거잖아. 근데 나는 그냥 그런 압박이 있어서 엄마가 원하는 '평범한' 삶을 살면 그건 내가 아니라고 여기니까. 꼭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고, 그렇게 나를 찾아가면서 살게 되면 보편적인 행복과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모든 것이 불행할 거라고 생각한 거고.


응응, 이해했어. 현실과 타협할 수 없는 너의 모습 때문에 불행하게 될 거다.


맞아.


그럴 수 있겠다.


그리고 나는 날 잘 알았어. 내가 내 신념대로 선택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또 막 행복해 하진 않는다는 거. 결국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내가 원하는 걸 선택하겠지. 주체적인 삶을 택하겠지만 그것도 완전한 행복이라고 느끼진 않을 거라는 걸 알았던 거 같아.


응.


아이러니 하지?


아니 근데, 그 상황이 보통 생각하면 지금은 자유주의 시대니까 원하는 대로 살면 좋은 거라고 통상적으로 생각하지만 너의 상황이 일제강점기와 비슷했던 거지. 그니까 네가 추구하는 것과 사회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까 네가 스스로 너의 선택을 했을 때 너에게 따라올 불이익도 잘 아니까 그랬던 거지.


맞아, 그때 상황이 그래서 그랬던 거 같아, 유독.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그게 이제 그때의 너잖아. 지금의 너는 어떤 변화가 있었어?


지금의 나?


이제 또 많은 경험을 통해서 바뀌어왔잖아. 세상도 그만큼 변했고. 그거에 따른 너희 철학에 변화가 있었어?


와, 진짜 내가 안 해본 생각이야.


그 이후로 철학을 안 했구만?


그치, 내가 철학적인 사고를 해보기에 재료가 부족했던 거 같아. 근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자면 어찌됐든 지금 상황은 이전보다 낫다고 할 수 있으니까. 내가 그 어디서 읽었더라. 철학자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레비나스인가. 개인이 타인으로 인해 규정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


뭔지 알 거 같아.


그래서 나는 그냥 나 혼자로서 완성이 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도 굉장히 신경을 쓰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나라는 사람도 굉장히 달라질 수 있는 거니까. 나는 타자화된 존재다. 뭐 이런 맥락의 글이었거든. 근데 그게 맞는 거 같아. 어찌됐든 내가 나의 주체적인 삶을 위해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내가 불행하다고 여겼던 건 결국 타인 때문인 거야. 난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해서 그런 부정적인 상황에 잇다랐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사실 철학은 그렇게 안 될 거 알면서도 이상적인 걸 상상해보는 거라고 전제를 해본다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건 타인이 나를 인정해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주체적인 삶 + 타인이 나를 인정해줘야 하는 거지? 이상적인 사회 자체가 개인의 개별적인 특성을 포용해야 된다고 생각하긴 해. 근데 너무 개인주의적으로 굴러가다 보니까 오히려 그게 더 안 되는 거 같기도 하고. 개인주의적이면 나의 이득을 생각하게 되잖아. 그러면 때로는 타인의 존재라는 게 나의 행복을 침범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거고. 그래서 혼자 사는 게... (웃음)


혼자 살아야 한다는 거야?


근데 사실 이게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범위를 줄이면 돼. 그니까 나를 정의해 줄 수 있는 타자의 존재를 지극히 줄여야 내가 행복한 거지. 내가 길을 지나가는데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내 얼굴에 침 뱉으면 화 안 날 거 같거든. 모르는 사람이 날 비난하는 건 아프지 않지. 근데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날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건 굉장히 슬프거든. 그러니까 범위를 넓게 잡지 않고 나를 완성시켜줄 수 있는 사람들의 폭을 줄여. 혹여나 그 사람들이 떠나가도 내가 미완성인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중요한 거 같아. 한때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거든. 내가 함께 한다고 마음 먹었으면 그 사람이 날 때리더라도, 헤어지더라도 날 좌지우지 할 수 없는 타인의 범주로 버리는 걸 하지 못했는데. 사실 그런 태도도 필요하잖아. 사실 절대적인 관계는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살아야 숨통이 트인다는 걸 깨달은 거지.


행복을 위해서 타인 재규정 같은 거구나.


응 그치.


좋은 정답 같아.


언니도 동의해? 언니가 생각하기엔 어때?


일단 실존주의라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해. 나도 일단 개인이 우선이고 개인의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내가 타인을 대할 때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는 것도 같은 맥락이잖아. 개인만의 주체적인 선택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거니까. 나는 내가 완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나의 행복은 내가 조절할 수 있으니까 내가 타인을 해치지 말자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그러지 않을 것 같다고 믿고. 나한테 있어 타인에 대한 의미는 그냥 타인이야. 나는 그냥 나야. 나는 타인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 그런 게 필요 없어. 어쩌면 내가 더 실존주의일 수도 있겠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게. 그러면 나는 도덕적인 사람으로 존재하니까 스스로 보기에 나만 잘 다스리면 되는 거지. 타인이 나에게 하는 행동에 상처받기보다 오히려 내가 타인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줬을 때가 속상한 거 같아. 한나 아렌트 읽었을 때도 내가 그런 일을 겪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고, 내가 상대를 해치지 말자고 생각을 하는 거지.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나는 악한 사람이고, 내 악함을 조심히 해야 한다. 타인은 그냥 타인이야.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어. 너는 너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타인과 아닌 타인을 구분하고. 근데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냥 타인이야.


그럼 가족들도 타인이야?


물론 그들이 나의 행복을 해치면 그건 나의 영향을 미치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니까. 하지만 나에게 가족이란 그러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는 거 같아.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 우리의 행복이라는 느낌이 있어. 가족은 논외인 거지. 근데 난 이 차이점이 신선해. 너랑 나의 관점이 다른 거 같아서.


우린 항상 그래왔잖아.


근데 되게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칠 거 아니야. 사소한 것도 생각하는 바탕이라는 게 있을 거고. 그 근원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사실 대화 나누면서 간접적으로 언니의 가치관을 접했을 때가 있잖아. 나는 언니가 날 되게 타인으로 생각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던 거 같아. 그렇다고 나한테 배려 없이 행동한다던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존재고, 물론 내가 언니의 행복을 제한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긴 하지만. 조건부 사랑처럼 느꼈던 거지. 사실은 이런 사랑이 이상적인 거잖아. 근데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내가 타인을 재분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 내 편이었다가 타인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내가 봤을 땐 너도 그런 일이 있으면 칼같이 굴진 않을 거고 나도 그러지 않을 거야. 근데 너와 나의 차이점은 내가 봤을 땐 너는 곁을 쉽게 내주고 나는 그걸 심사해. 바로 곁은 내주지 않고 일정기간 타인으로 지내다가 언젠가는 가족의 범주에 들어오는 거고. 너는 그 기준선이 낮았던 거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조금만 잘해주면 바로 곁을 내줬잖아.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곁에 둘 사람이 아니면 재분류를 하는 거잖아. 나는 그 기준이 상당히 높아.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그 기준은 많이 높은 거 같아.


그러네.


내가 결혼이 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의미는 그 심사를 다 거쳐서 이쪽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거지. 그러면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 모든 걸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지. 아주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하지.


나는 거치는 중이야?


여울이 거쳤지. 나는 거쳤다고 생각해.


언제부터?


이거는 딱히 기준이 없어. 감정이 어느순간 커지면서 내가 너에게 영향을 받더라고. 그걸 어느 순간 느꼈고, 그게 나한테 큰 영향이라고 느낀 것 같아.


어떤 영향이야?


그거를 가장 크게 느낀 건 질투심이긴 해. 단편적으로 보면 악영향이었겠지. 나의 감정을 흔들리게 했으니까. 나는 타인을 신경쓰지 않는데 신경쓰게 만들었으니까 감정선의 심사는 거쳤다고 느낄 수 있었던 거지. 나는 지금 얘기하면서 느낀 건데 난 철학적인 얘기를 되게 좋아하거든. 이런 얘기들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철학적인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잖아. 사르트르, 칸트 하면 뭔지 알아야 하고. 근데 이 모든 이야기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재밌어하는 사람을 처음 봐. 내가 악의 평범성을 얘기했을 때 그걸 아는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 그리고 이걸 너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어려운 얘기 안 하고. 딱 비슷하잖아.


아, 진짜? 근데 나도 그런 거 같아. 스스로 사고해본 적은 있어도 다른 사람이랑 이렇게 얘기해본 건 처음이야.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변해가고 어떻게 살고자 한다는 걸, 평상시에 말하기는 오글거리기도 하고. 재밌네.


맞아, 되게 많은 게 담겼다.


우리는 너무 조금 살았잖아. 시시각각 경험들이 변하니까 나중에 또 어떤 생각들로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잖아. 모든 생각을 공유하고. 사실 지금 내 현시간 상태와 기분과 가치관을 잘 알고 있는 건 언니라고 생각하거든. 같이 있으면 닮아가잖아. 가치관이 같은 맥락에서 만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신기하게도? 나는 타인을 많이 의식하는 사람이고, 어쩌면 곁을 많이 내주는 것만큼 사람을 좋아하잖아. 근데 언니는 곁을 잘 내주지 않고, 그 기준이 명확하고.


나 냉소적이야.


(웃음) 맞아, 냉소적이야. 근데 난 이게 언니와 대조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뿌리 부분에서 같을 것 같아. 그래서 얘기가 잘 통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내가 저번에 언니는 왜 반려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게 인생일대의 목표냐고 물어봤잖아. 근데 난 그 질문에 대한 언니의 대답이 명확하진 않다고 느꼈거든. 나는 아무 이유 없는 가치관의 형성은 없다고 생각해. 그것보다 더 명확한 이유가 있을 거고, 그게 본질적으로 우리가 티키타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근본적인 요소일 거 같아. 그래서 그게 뭔지 너무 궁금해. 찾고 싶어.


지금 말하면서 느낀 건데, 사실 우리 둘 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곁을 누군가한테 내주긴 해야하잖아. 내 편이 있어야 된다라는 걸 동의하는 건데. 그게 우리의 뿌리 아닐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 편의 모양새, 가족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 우리가 둘 다 원하는 삶의 형태인 거지.


난 그럼 뭐야. 마라탕을 안 먹어봤는데 마라탕을 먹고 싶어. (웃음) 언니는 마라탕을 먹었으니까... 마라탕을 먹고 싶어.


그래 그게 맞을 수도 있어. 나는 이 가족의 존재가 너무 소중해서 나도 미래에 온전한 내 편과 살고 싶어. 너는 내 편이 없어서 그런 내 편을 만들고 싶어. 마라탕 진짜 맛있다는 얘기를 듣기만 했던 사람과 마라탕을 먹어본 사람이 또 먹고 싶은 사람이 마라탕을 원하는 건 결국 같잖아. 결국 모두가 피자가 아닌 마라탕을 원한다는 걸 아는 거야.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음식이 마라탕인 거지.


(웃음) 그러네.


둘 다 마라탕 너무 소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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