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 Sep 20. 2024

엄마와 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가족'이라는 공통분모의 영화를 담담하게, 꼼꼼하게 풀어낸 그의 작품들과 배우들의 전달력 있는 감정 연기를 보면서 감독의 영화를 하나씩, 천천히 아껴가며 찾아보게 되었다. 사실 나는 사랑니 같은 친정 식구를 보면서 '가족'이라는 타이틀에 대해 적잖은 부담과 쑥스러움을 늘 걸치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나 홀로 나지막한 저항도 해보고, 묘하게 울렁이는 감정선을 느껴보기도 했다.  '걸어도 걸어도', '태풍이 지나가고'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베 히로시, 키키 키린이라는 삼 박자가 찰떡궁합 같이 잘 만들어낸 영화 같아서 가끔 마음의 약이 필요할 때 보고 나면 그 약발이 제법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 같았다.




"엄마, 내일(연휴 둘째 날, 일요일) 일정 어떻게 되세요? 약속 있어요?"

"나, 약속 없는데, 왜?"

"그럼 우리 둘이서 드라이브 갈까요?"

"좋지! 몇 시에 나갈까?"

"오전 열 시 어떠세요?"

"그때 괜찮다. 아침에 미사 마치고 나면 시간이 딱 된다."


어제(연휴 첫째 날) 저녁, 열 번도 넘는 마음속 갈등 끝에 친정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친정 엄마께 드라이브 제안하는 게 무슨 갈등씩이나 할 일이냐고 반문하겠지만 엄마와 나는 여느 모녀지간의 투닥거림이 아니라 어색함이 더 짙기 때문이다.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고서는 설거지하는 내내 '괜히 했나.' 하는 의구심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다. 단 둘이서 5인승 자동차 안에 그것도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느껴지는 갑갑함과 냅다 전화드렸다는 후회와 한 편의 후련함이 뒤섞이고 있었다.


"나도 내일 같이 갈까요? 운전기사 할 수 있는데."

남편은 내 속도 모르고 천진하게 물었다.

"내일 저녁 출근이잖아요. 그냥 쉬어요. 나랑 엄마 둘이서 다녀올게요."


오전 열 시가 되어 엄마를 모시러 친정으로 갔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셨다.

"갑자기 웬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냐?"

"그냥...... 5일 연휴인데 엄마 심심할까 봐 그랬지. 경주 어때요? 점심으로 엄마 좋아하는 초밥도 먹고."

"어, 어. 다 좋다, 다 좋아.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하자."


내비게이션 목적지 설정을 하니 도착 소요 시간이 한 시간 이십 분이다. 그 시간 동안 무슨 대화를 할까. 혹시 내가 또 욱해서 감정을 터트리는 건 아닐까.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그렇게 되면 오도 가도 못하니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막 출발하려고 하자 전화가 울린다. 

발신인은 서울 고모, 어제저녁에 (시누이의 친정, 나의 시댁) 남해에 도착한 시누이다.


"새언니, 지난주 제사 때 엄마 모시고 갔던 카페 이름이 뭐예요?"

"제사 때요? 카페 두 곳에 갔어요. 제사 당일 오후에는 ***가고 그다음 날 오전에는 ***가고."

"그리고 새언니, 5월에 언니가 엄마 모시고 아귀찜 먹으러 간 곳은 어디예요? 엄마가 맛있었대서, 오늘 모시고 가려고요."

"아, 거긴 ***이에요. 그때 어머니 잘 잡수시더라고요."

"새언니 내일 오는 거죠? 내일 만나요."


다행인지 아닌지, 엄마와 나의 대화 내용은 조금 전 통화를 마친 시누이에 관한 것이 되었다. 시누이 아들 군제대가 얼마 남았는지, 이번에 유학 간 시누이 첫째가 어느 나라로 갔는지, 개업한 약국은 좀 어떠한지, 시누이의 시부 건강은 어떠한지...... 시누이에 관한 대화를 시작으로 경주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가 전공하고 있는 학과 이야기, 나의 회사 이야기, 아들 며느리 이야기, 사위 이야기, 빠지지 않는 엄마의 남편 원망까지. 어제저녁, 갈등과 체념으로 널뛰던 내 마음은 쏙 사라지고 흉내를 내서라도 해보고 싶었던 모녀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보문호수 근처 호텔 일식당으로 가니 예약으로 자리가 다 차서 식사가 어렵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바로 옆 중식당으로 갔더니, 다행히도 한 자리가 남았다고 입장을 시켜 주었다. 요리 두 가지를 시켜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시간가량 식사시간을 가졌다. 엄마는 식사 내내 "맛있다."라는 말을 하셨다. 

"엄마 다른 거 더 시킬까? 잘 드시네."

"아이고 됐다. 맛있는데 배불러서 더는 못 먹는다."


'나도 엄마랑 이런 대화가 되네.'

'시어머니 모시고는 괜찮다는 카페며 식당을 다녔는데 엄마랑은 별로 없었구나.'

'다음에는 일식당 미리 예약해서 다시 한번 모시고 와야겠다.'




친정 부모님, 특히 엄마에게 있어서 나는 애물단지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승부욕 강하고, 학업 욕심이 많았던 큰딸과 막내아들에 비해 먹고, 쏘다니는 쪽으로 더 열중했던 나를 보면서 엄마의 한숨이 끊이지 않았고, 나는 그 한숨이 주는 짓누름에 대해 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러한 처우를 받아들였다가 내가 아이를 낳고 보니 반문이 생겼다가 그 반문이 무시당하자 되레 조용히 거리를 두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니 부모님은 오히려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거리는 다름 아닌 나를 위한 조치였으며 어떤 기대나 욕심, 깊은 이해타산도 아니었다. 마흔 살이 넘어가면서 '가족'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었고, '가족이니까', '가족이라면'이라는 전제에 대해 수동적으로 지켜왔던 나의 의무감과 부담감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얼굴과 그릇이 맞닿을 듯 그릇째로 입에 갖다 대고 국물을 후루룩 드시는 엄마를 슬그머니 바라봤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할게요."라는 간지러운 말은 우리 모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삼 남매 중에서 그녀의 기질을 가장 닮은 나의 25년 후 모습을 미리 보고 있다는 묘한 느낌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주말 오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