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무명(無名)이지만 말이죠.
안녕하세요 글쓰는 직장인 조준영입니다.
필자는 새해가 밝기 전에, 다음 해에 달성하고 싶은 것들을 미리 공책에 적어두곤 합니다. 작년 12월에 기록한 신년 목표 중 하나는 "종이책 출판 방법 공부"였습니다. 원고 작성부터 서점 매대에 올라가는 과정 전부를 혼자 해 보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자책 출판도 좋지만 종이책을 개인 출간하고 싶기 때문이죠.
원고나 기획서를 작성하여 출판사에 투고하여 출판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걱정이 앞섰습니다. 인플루언서도 아닌 평범한 직장인의 글과 기획은 출판사의 주목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건의 이메일을 받을 출판사들이고, 이미 내부적으로 기획해 둔 책을 만들어 내기에 바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실제로 필자와 같은 무명작가의 원고 투고를 통해 책으로 출판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특정 출판사는 원고 투고의 약 3~5% 정도만이 책으로 제작된다고 하고, 어떤 출판사 편집자분은 아예 대놓고 기획 출판만 한다고 하더군요. 기획 출판이란 출판사가 미리 어떤 책을 쓸지 방향성을 잡아놓고 책을 써 줄 작가를 찾아가는 형태를 의미합니다. "나 이런 책 써보고 싶어요"의 원고 투고 형식과는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판사도 매출을 일으키고 이익을 내야 하는 사업체이기 때문에 유명한 예비 저자가 이미 일구어 놓은 브랜드 가치에 소위 숟가락 얹어서 보다 쉬운 판매를 일으키고 싶을 겁니다. 그러니까 닭이냐 달걀이냐의 논쟁에서 출판사는 바로 잡아먹을 수 있는 다 큰 닭을 저자로 선정하고 싶어 한다는 거죠. 필자와 같은 무명(無名) 작가는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한 달걀로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겠죠.
다만 이러한 성향은 출판사의 철학에 따라서 언제든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애니메이션 명가로 알려진 픽사(Pixar)의 감독 피트 닥터(Pete Doctor)는 신규 IP로 제작된 영화 [엘리오]의 실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토이 스토리 27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출판업계의 언어로 다시 이야기하면 생각의 길 및 돌베개에서는 유시민 작가의 책만 출판하고, 민음인에서는 로버트 기요사키 책만 내려고 하는 것의 반대를 피트 닥터는 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필자는 수많은 국내 출판사 중에서도 피트 닥터와 같은 철학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가 최소 두어 곳은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원고 투고를 시작했습니다. 즉 서구권에서 이야기하는 부자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진다 (the rich get richer, and the poor get poorer)는 우화와 맞서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국내에서 자주 쓰이는 부익부 빈익빈 표현의 또 다른 사례가 되지 않겠다는 용기가 픽사의 사례를 듣고 생겼습니다.
그렇게 서툴지만 처음으로 출판사를 대상으로 '조준영 작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며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메일 작성을 끝내고 '보내기'를 누르기가 떨릴 때에는 버벌진트의 1집 앨범인 "무명(無明)"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무명(無明)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무명(無名)과는 다른 뜻으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 글의 부제에 한자를 쓴 이유가 필자가 한자를 잘해서가 아니라 아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바로 당시의 버벌진트가 1집 무명(無名) 래퍼임에도, 자신의 랩을 몰라주는 이들이 어리석다는 무명(無明)으로 앨범 이름을 지은 패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심지어 필자는 버벌진트의 1집 사인반을 보유하고 있는데 여기에 "명반 구입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이러한 마인드가 필자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비록 무명(無名) 작가이지만 말이지요.
버벌진트는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이러한 초심을 잃은 모습을 쇼미더머니 논란의 심판으로 보였던 적도 있어서 현재에는 팬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 1집의 패기를 기억하고자 본 앨범을 소장하고 있네요.
그렇게 피트 닥터 및 버벌진트 1집을 통해 용기를 얻어 우여곡절을 넘긴 뒤, 출판사들에게 필자의 출판제안서를 보냈습니다. 지금도 계속 보내고 있고요.
과연 저에게도 "고전(古典) 구입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사인할 날이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