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사에 입사한 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의 프로베이션 기간은 6개월.
특출나게 잘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믿었다.
초반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사수와도, 진솔한(?) 대화를 나눈 후에는 함께 일하는 데 큰 무리는 없는 수준이 되었다.
이제 매니저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녀는 러시아 사람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인해 H사가 러시아 사업을 철수하면서, 그녀는 생전 한 번도 와본 적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일본으로 발령받은 비운의 인물이었다.
물론 사정은 딱했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의구심이 있었다.
일단 그녀는 너무 정신이 없어 보였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시장, 그리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라 그런 건지,
혹은 아직은 10명 남짓 되는 팀을 매니징할 역량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항상 바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는 건 확실하다.
새해가 되고 그녀가 나에게 1:1 미팅을 요청했다.
H사는 매니저급 이상은 대부분 일본에 거주하기 때문에, 평소 얼굴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어 팀장, 팀원간의 사이가 더 서먹했다.
비대면으로 이뤄진 팀즈(Teams) 미팅.
그녀는 첫마디부터 이렇게 말했다.
Min, 너는 업무를 배우는 속도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 보다 느린 것 같아
이게 뭔 X소린가.
피드백이라는 게 대체로 부정적인 내용이 많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건 잘 안다.
그래도 이해가 되는 피드백이라면, 나는 기꺼이 100%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스스로도 업무를 잘하고 있는지 팀원들의 의심을 받고있는 상황에서 나에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게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나는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지 구체적인 이유나 예를 좀 들어줄 수 있을까?
그녀의 답변은 나의 몇 달 전 모습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나와 한때 껄끄러웠던 사수가 몇 달 전에 한 얘기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업무가 아닌, 처음 해본 일을 서포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 업무 능력이 맘에 들지 않았단다.
이건 마치 경찰관에게 왜 화재 진압을 능숙하게 못 했냐고 다그치는 꼴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지속되면 프로베이션 통과를 장담 못하겠다고 했다.
어떻게 얻은 첫 정규직인데! 이 발언은 나를 긁히게 했다.
한국 회사와 다르게 외국 회사는 나 스스로를 어필하는 게 무지하게 중요하다 - 근데 내가 이게 미흡해서 이런 얘기를 듣는구나.
난 초등학교 때부터 나 스스로를 어필해서 다년간 학급 회장을 해온 나름 경력직이다.
적어도 내가 잘한 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어필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극한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1월 말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