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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야 Nov 23. 2022

효율적인 사람

 언제부터인가 내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잘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 귀하다고 여기는 인연들과도 일 년에 한두 번 만나 식사 한 끼 정도 하는 게 고작이다. 결혼 후에는 가정을 돌보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고, 잘 살기 위해 요가에 푹 빠지고 나서는 지인들과의 만남을 위한 시간을 빼놓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이렇다 보니 강제로라도 시간을 내어야 하는 결혼식, 돌잔치, 집들이 같은 이벤트 소식에 한껏 들뜬다. 공식 출장으로 공연이나 전시를 관람할 때 드는, 그런 들뜸이다.


 며칠 전 고향에 사는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고향은 차로 한 시간 삼십 분 거리로 그리 멀지는 않다. 시간대를 잘못 맞춰 차가 밀리면 거진 세 시간도 걸리기 때문에 주말에는 늦잠을 포기하더라도 새벽같이 일찍 출발하는 게 상책이다. 계획형 인간이라 전 날에 보통 다음날 옷과 일정을 정해두고 자는데, 이날은 왠지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놀다가 잠들어버렸다. 느릿느릿 여유 가득한 남편의 삶과 복닥복닥 볶아치는 내 삶이 교차하는 반가운 시간이 오랜만이라서 이거나, 맛있는 저녁에 맥주 한 캔이 일품이라서 였을 거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자도 일찍 일어나지는 새 나라의 젊은 늙은이는 이날도 일곱 시에 눈을 떠버렸다. 알람 시간보다 삼십 분은 일찍 일어난 터라 이불 속에서 발로 남편의 발을 한 번 비비적, 조이 뱃살을 한번 비비적거리면서 핸드폰으로 교통 상황을 검색해 봤다. 1시간 40분이 걸린다던 예상 시간이 양치를 하는 동안 2시간으로 늘어났다. 아! 단풍시즌. 예상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세수도 하지 않고 잠옷 바람으로 원피스, 코트, 신발, 스타킹을 요가 가방으로 쓰는 큰 가방에 우겨 담았다. 격식 있는 자리에서만 들던 브랜드 가방은 어디에 잘 두어서 찾을 수 없었다. 출근용 가방 중 제일 나아 보이는 것으로 들고 털 슬리퍼를 신은 채 차로 뛰었다.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싣고 출발. 예상시간 2시간 10분. 나쁘지 않군. 바로 엄마 김장을 좀 도와드리고 결혼식에 갔다가 친구 집들이에 가면 되겠어.


 가성비와 효율성. 어떤 선택을 할 때 투철하게 따져보는 부분이다. 오랜기간 순수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노래쟁이가 효율성을 요구하는 사회생활에 부딪히며 가장 호되게 채찍질 당했던 부분이어서였을까? 계산적인 모습을 버리기 어려울 때가 있다. 지겨운 효율성 때문에 나는 이날 친정 엄마와 시간 보내기, 결혼식 참석, 집들이 참석 일정을 하루에 잡았다. 가능하면 오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까지가 목표였다.


 친정에 도착해 김장을 거들었다. 엄마는 내가 결혼식에 가는데 김치 냄새가 날 수 있다면서 속 묻히는 건 하지 말고 통을 옮기는 걸 도우라고 하셨다. 결혼식에 갈 땐 옷을 갈아입고 갈 거라서 괜찮다고 해도 극구 만류하셨다. 조금 돕다가 결혼식에 갔다. 결혼식이 끝나고 친구 부부가 초대한 집들이에 도착했다. 집들이에 초대한 친구는 내가 제일 아끼고, 나한테는 제일 친한 친구이다.


 친구는 작년 9월에 결혼했는데, 그 사이 아기를 가져서 배가 나와있었다. 곧 1월이면 아기가 태어난다. 임산부 태가 나는 친구를 보자 많은 시간을 놓쳐버려 미안했다. 중간중간 연락은 했었지만, 이렇게 배가 많이 나올 때까지 얼굴 한 번 못 봤다니.


 친구는 나를 위해서 된장찌개를 끓이고, 맛있는 밥을 했다. 집 청소도 말끔히 해 두었다. 친구 부부가 알콩달콩 소꿉놀이하며 사는 걸 보니 이 집에 태어날 아기도 얼마나 행복할지 눈에 선했다. 오랜만에 만나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피로가 몰려왔다. 아침에 그렇게 일찍 출발해 볶아치고 저녁이 되었으니 하품이 나오지 않을 수가 있나.

 

 결국 서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엄마 집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 사실 피곤해도 바로 집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냥 가버리면 서운하다고 하룻밤 자고 가라는 엄마 말에 친정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뻗어버렸다. 피로가 몰려와 잠들려는데, 엄마는 거의 잠든 나에게 계속 얘기를 건네셨다. 잠들어 대답도 잘 안 하는데 계속 엄마 얘기를 하셨다.


 다음날 엄마가 바리바리 싸 준 김장 김치, 돼지고기, 내가 좋아하는 총각김치를 싣고 집으로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어젯밤 잠결에 들었던 엄마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그냥 가버리면 서운하다는 말도 생각났다. 친구가 해준 맛있는 밥도 생각났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들인다.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준비하고, 함께 있을 땐 그 시간에 집중한다. 문득 이상한 가성비와 효율성을 따지느라 그들과 같이 진심 어린 방식으로 화답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졌다. 짧은 시간에 여러 개의 일정을 잡은 데는 나의 딸로서의 의무, 친구로서의 의무를 완수해 내려는 욕심이 그득했다. 그 시간에 집중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다음에 고향에 갔을 땐 엄마랑도, 친구랑도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깊게 머물다 와야겠다. 아주 비효율적인 뜨끈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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