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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야 Nov 23. 2022

비 오는 날도 산책

 아침 6시.

 매일 산책하는 숙련된 산책러인데, 비 오는 날엔 강아지도 나도 이불에 엉겨 붙어 비비적 거린다.

 조이는 납작 엎드려 솜뭉치 같은 양쪽 앞 발(우리 사이에는 손으로 쳐준다.) 사이 바닥으로 얼굴을 바싹 붙이고 내 움직임을 살핀다. 눈을 마주치고 꿈뻑꿈뻑. 아침에만 즐길 수 있는 기분 좋은 게으름이다.


 조이의 꾹 다문 입이 별안간 활짝 열리더니, 팔을 쭈욱 늘려 엉덩이를 들어 올린다. 진정한 다운독 포즈. 슈크림 같은 부드러운 털이 사방으로 퍼지게 부르르 털고 나면 차갑고 촉촉한 코를 내 인중에 쿡쿡 찌르며 녀석 나름의 뽀뽀를 한다. 가끔 짠맛이 나는 뽀뽀다. 나는 녀석의 몸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온몸을 긁는다. 그러면 커다란 몸을 다시 동그랗게 말아 엎드리면서 내가 입은 잠옷과 이불 냄새를 킁킁 맡는다. 살짝 눈을 감는 강아지와 나.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조금 더 이 게으름을 즐기고 싶지만 휴일이 아니고서야, 출근한 사이 심심함으로 몸부림칠 조이를 위해 산책을 서두른다. 힘을 다 빼놔야지.


 실내에서 살기 시작한 2개월령부터 줄곧 실외 배변만을 고집한 녀석은 비 오는 날이라고 편의를 봐주진 않는다. 조이는 실내에서 단 한 번도 '응가'를 하지 않았다. 가끔 집 안에서 뛰놀면서 괄약근 조절이 어려울 정도로 신이 날 때만 배변패드 위로 후다닥 달려가 '쉬야'를 한 적은 있지만, 그마저도 6개월령이 지나면서는 드물었다. 개들의 실외 배변에 대해 좋니 나쁘니 하는 논란이 있다. 신장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몇 날 며칠 산책을 안 시켰는데 실패했다. 마침 장마라 핑계가 좋았다. 애초에 나라는 사람은 뭐든 억지스러운 건 영 맞지 않는다. 하기 싫다면 하기 좋은 걸 선택하면 되니까. 조이는 배변 욕이 생기면 현관문 아래 틈새로 코를 들이박고 들숨 날숨을 불어대는데, 당장 바닥에 저질러 버리지 않고 참으면서 신호를 보내는 녀석이 참 기특하다. 아직 어린 강아지가 배변 훈련을 스스로 하겠다는데, 실내 배변을 훈련할 이유가 없었다.


'응가쉬야는 밖에서!'라는 단호한 조이의 얼굴. 그녀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다.


비 오는 날 개 산책을 위한 무장 튜토리얼

반려견용 우비를 꺼낸 순간부터 줄행랑치는 개를 잡아 나의 튼튼한 두 다리로 개의 몸통을 고정하고 우비를 장착한다.

하네스(몸통을 감는 줄)가 다 젖을 수 있으니 오늘만은 목줄을 채운다.

보호자도 우비를 장착한다. 나는 제주 여행에서 오천 원 주고 샀던 일회용 우비를 벌써 서른 번 이상 쓴 것 같다. 이것도 환경 보호로 쳐주나?

비가 많이 온다면 보호자의 시야 확보를 위해 모자를 우비 안에 쓴다. 물론 모자는 젖는다. 패션 뽐내기용 모자는 비추지만 없으면 그거라도 써야 편하다.

우비 안으로 응가 봉지 가방을 멘다. 가방은 배 쪽에 자리하게 멘다.

 (킬링 포인트) 롤 형식으로 되어있는 응가 봉지의 끝자락을 가방 밖으로 빼내고, 또 그 자락을 보호자 우비의 배 부분의 단추 사이로 통과하여 밖으로 빼 둔다. 지금까지 여러 방법을 써봤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에 가방이 다 젖거나, 비 오는 날 산책 줄을 한 손으로 잡은 채 우비 안에, 가방 안에, 응가 봉지를 꺼내 응가를 치워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그 와중에 중대형견 조이가 '당기기'를 시전 하기라도 하면 난감하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 방법으론 '꾸안꾸 산책룩' 연출하진 못한다.


비에 맞서기 위한 무장을 하는 동안 조이도 알아차린다. 그러고는 맑은 날의 산책보다는 살짝 텐션을 낮춘다.


'아! 오늘 그날이구나! 발바닥이 좀 차갑겠군! 길고 꿈틀거리는 녀석들이 얼마나 나왔으려나?'


 우비를 입은 녀석의 모습은 정말 사랑스럽다. 남들이 보기에 너무 길다 싶은 롱다리는 우비가 짤롱 해 보이는 효과를 낸다. 크롭 기장이라고 우겨본다. 우비 모자를 쓴 얼굴은 평소의 1/3 정도밖에 안돼서 '조막만 한' 얼굴이 완성된다. 녀석의 얼굴이 이렇게 작았다니. 무엇보다 가장 사랑스러운 건 녀석의 걸음걸이다. 전신 슈트 모양의 우비가 편하지만은 않겠다만. 평소에는 다리를 앞뒤로 쭉쭉 뻗었다면, 우비를 입고 나선 위로 총총 뛰는 모양새다. 산책 내내 총총 걷는다. 이렇게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비 오는 날 산책이 싫지만은 않다. 선선한 가을비는 오히려 기다려진다.


 비에 젖은 나무 냄새와 풀냄새가 짙은 흙냄새와 뒤섞여 조이와 나를 둘러싼다.

 습기를 머금은 파란 공기가 들숨으로 들어오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편안해진다.

 촉촉하고 시원하고 개운하다.

 자주 걱정과 의심을 빚는 뇌가 마비되는 시간이다.

 지면이 아래로 움푹 들어간 잔디밭에는 물웅덩이가 생기는데 빗물이 찰랑찰랑 얌전히 잔디를 덮고 있다. 그 위로 다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면 '싱그럽다, 희망차다, 소중하다, 행복하다, 아름답다.' 같은 전형적이고 진부한 감탄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험을 한다. 조이를 알기 전엔 몰랐던 행복을 오늘도 선물 받았다. 조이는 나에게 항상 좋은 것만 준다.


비 오는 날에도 강아지 산책시키느라 힘들겠다는 말도 자주 듣지만 비 오는 날의 산책하는 이유는 조이 때문이 아니다. 빗속 산책을 선택했기에 내가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녀석과 보내는 싱그러운 휴식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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