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엄마의 투병, 그리고 입원
대학교 4학년, 소위로 임관을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임관종합평가를 받게 된다. 체력측정, 정신전력 평가 등 학업은 학업대로, 종합평가는 종합평가대로 준비하느라 바쁜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따르릉따르릉-. 받고싶지 않았던 번호였다. 엄마가 직장에서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은지 얼마 안되었던 나에게 그저 병이 아니길 바라는 간절함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나보다. 위암 4기, 이미 타 장기로 퍼져버려 수술이 불가하다며 짧으면 5개월이라고 하였다.
가슴의 답답함, 그러나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말밖에. 이번엔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고 하는 엄마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딨냐며 아닐 거라고. 섭섭해하는 엄마에게 오히려 무심한 척, 컨디션이 그런 거라고 울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결과가 나오기 그 짧은 시간을 무섭고, 두려웠을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고 당시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나는 갑자기 고열이 시달리게 되었다. 39.5도. 결국 응급실행과 더불어 염증수치가 높아 퇴원불가라는 말과 함께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문제는 병원에서도 정확한 진단명을 알 수 없다며 계속 입원을 해야 한다 하였다. 당시 엄마는 서울에서 입원 중이라 아빠와 언니는 내가 있는 대전을 오가며 나까지 간호를 해야 했다. 약 3주 간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다행히 퇴원은 했지만 그때부터 진로고민이 시작되었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병원에서 지내는데 이 상황에서 임관을 할 만큼 내게 중요한 것인가, 가치가 있는가라는 고민이 들었다.
임관을 포기하면 지난 3년간의 내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겠지만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엄마와의 이별이 눈앞에 닥쳐오니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고민을 알았는지 엄마는 소위로 임관하는 걸 꼭 보고 싶다 하였다. 입대를 포기하고 엄마의 간병인으로 지내려고하는 나를 엄마는 극구 만류하였다. 엄마의 소원이라며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평생 못 잊을 엄마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행복한 임관식을 맞이했다.
극심한 고통에서도 4년을 버텨준 엄마의 사랑과 응원이 있었기에 그 시간을 버티며 군생활과 투병기를 함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대원을 챙기며 아무런 내색을 할 수 없었기에 혼자 속으로 끙끙 앓았던 그 시간은 매일이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국가와 부대원들을 위해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이, 정작 내 가족은 지키지 못하는 무책임한 모습같았다. 아픈 엄마 그리고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희생하고 있는 아빠와 언니에게 나의 짐을 준것 같아 미안한과 죄책감이 되어 되돌아왔다.
꿈을 이룬 게 감사하면서도 본인 가족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게 맞는 건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 건가? 내안의 감정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훈련을 마치고 달려가 병원에서 밤을 지새울 때면 그 감정들은 나를 더 가만 두지 않았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처럼 기쁨, 슬픔, 버럭 등 내 속의 감정이들의 싸움속에 군생활은 이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글을 쓰며 스스로를 사랑해주지 못했던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가족의 투병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도 자책감에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를. 그때는 그게 나와 당신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자, 노력이었다고. 내일 또 다시 죄책감과 미움이 찾아오더라도 더 이상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자고. 그렇게나마 나의 슬픔과 미움이 아주 조금이라도 무뎌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