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일은 언제나 환영!
저는요, 참 협업에 재능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어려워서 혼자 있는 걸 선호해 왔지요.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낯부끄럽고 그로 말미암아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부담도 너무 컸습니다. 자라면서는 이유가 조금씩 바뀌었는데요, 어리숙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 같아서, 혹은 다른 사람들을 나만큼 믿지 못해서 혼자 무언갈 하는 게 훨씬 편히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꼬마 시절 학교 숙제를 할 때도 아득바득 글이며 그림이며 만들기며 혼자 완성해 가곤 했죠. 지금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때만 해도 어린 저는 자수성가를 할 거라고 믿었어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죠? 다행히 여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스물 후반까지 그 버릇은 계속됐습니다. 뜬금없이 경영학부에 진학한 저는 '팀플'을 마주하게 됩니다. '팀플'의 악명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자자한지, 저는 대학 입학 전부터 이미 겁을 먹고 있었죠. 저는 심지어 경영학 중에서도 마케팅 외길을 걸었어요. 네, 대학 마케팅 강의에서 팀플은 절대로 제외되지 않는 활동이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혼자서도 잘한다고 생각했고, 팀을 위해서라기 보단 제 학점을 지키기 위해 남 보다 더 많은 일을 하며 희생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매번 출처 없는 자료를 찾아오거나, 가독성이 떨어지는 PPT 슬라이드를 만들어 오거나, 발표 하루 전날 연락을 받지 않는 팀원들을 마주하게 되자 그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인생에 혐오감을 느끼던 4학년 때는 교수님께 팀원들이 적극적이지 않다는 명분으로 혼자 팀플을 해도 되냐고 여쭤봤다가 교양 수업에서 공개적으로 혼이 나기도 했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이 잘못된 태도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하는 모든 일이 '팀플'인데도 불구하고요. 혼자서 거의 완성해 간 업무를 사수에게 피드백받는 상황에선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았지만, 여러 팀원과 기초부터 일을 다져가야 할 때면 수많은 의견을 듣고 정리하는 것 자체가 힘이 들어 차라리 홀로 일하고 싶었던 적이 아주 많았습니다. 언젠가는 여느 때처럼 그런 생각으로 한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한 마디를 거드는 것조차 눈치 보이던 분위기라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생각지 못하게 회의에서 말을 하지 않아 실망했다는 팀원 평가를 받았죠. 의아함과 불쾌함이 동시에 느껴지며 그제야 제가 회사라는 조직에 앞으로도 영영 적응하지 못할 거란 걸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브런치에 이전에 고백한 것처럼, 해일막걸리를 창업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혼자 일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그때 아직 마음이 아물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사람이 엄청나게 두려워서 안절부절못하며 날카로운 방패를 들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러 도움으로 두려움을 희석할 수 있었어요. 우선 내복약 조합을 바꾼 게 아주 성공적이었고요. 해막에서 보낸 시간이 즐거웠다며 말과 글로 표현해 주신 손님들이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용기를 얻은 후엔 오히려 제가 같이 일해보자며 먼저 손을 내미는 상황도 생겼습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최근 진행되었던 '술이술이 마수리' 행사였어요. 좋은 인연으로 알게 된 타로 마스터님이 계신데, 마침 타로를 진행하고 임상을 해 볼 장소가 필요하시다고 하셔서 '그럼 해막에서 하시죠!'하고 호방하게 내질렀답니다. 내내 외치던 일관성 있는 브랜딩과는 거리가 있는 선택이긴 했지만 일단 타로 마스터님이 괜찮은 분이란 걸 알았고, 재밌어 보여서 기획부터 실행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누가 오기는 할까 하는 걱정과는 다르게 하루체험으로 얼굴을 뵌 분도 와주셨고, 타로 마스터님과 인연이 닿은 분들도 응원차 방문해 주셨죠. 타로 카드 점과 막걸리 칵테일을 묶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했는데요, 타로 결과도 신통방통하고 칵테일도 맛있다는 현장 반응을 지켜보느라 내내 뿌듯했습니다.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뜻깊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 후 잠시 다른 일에 몰두해 있었는데, 타로 마스터님께서 그날의 경험이 꽤 좋으셨는지 한 번 더 진행해 보자고 연락 주셨어요. 그렇게 7월에 앵콜도 진행했습니다. 이때는 원활한 안내를 위해 사전 예약을 받았는데, 대부분의 자리가 매진이 되어 크게 놀랐답니다. 꼭 방문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못 오신 분들을 제외하고도 정말 많은 분들이 구석진 해막까지 와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모두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가신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았고요.
이번 협업이 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우선 저와 타로 마스터님 사이에 이미 친분이 있던 것과, 그래서 서로를 배려하고 다정하게 대했던 태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학교나 회사나 사람 사이를 맞춰갈 시간을 주지는 않죠. 또 둘 다 그리 높지 않은 목표를 세웠고, 그걸 이뤘고, 과정을 즐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목표와 현실 사이 괴리감을 알아차리면 그만큼 초조함만 늘어나잖아요. 하지만 저희는 손님이 한 분만 오셔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흘러가는 모든 시간을 긍정적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음, 그리고 서로의 역할 구분이 명확했어요. 막걸리 칵테일은 제가, 타로 카드는 타로 마스터님이!
'술이술이 마수리' 행사를 통해 저는 다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의지를 얻은 것 같습니다. 솔직히 대뜸 다른 일을 벌이기엔 조금 떨리긴 하는데요. 천천히, 다정히 다가와 주시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어떻게 되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앞날이 요즘은 호기심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해일막걸리와 살갑게 작당모의를 하실 분들께 미리 환영한다는 인사를 적어 둡니다.
이건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타로 마스터님의 지인 분을 통해 재미로 점성술을 보았더니 저에게 닿은 별자리 중 하나인 전갈자리가 술과 발효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될 운명이라네요? 돌고 돌아 태어난 하늘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