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몰라 Dec 23. 2023

나도 끼워줄래?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

 “아란아. 정인이랑 힐리언스 선마을 다녀와. 이모가 신청해놨어.”

 이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시형 박사님이 만든 곳인데 힘들게 신청했다며 잘 다녀오라고만 이야기해줬다. ‘이시형 박사? 그 사람이 누구지?’ 그때는 몰랐다. 정신의학계 권위자라는 것을. 그냥 3일 놀고 오면 된다고 생각하며 흥얼거리며 짐을 챙겼고 사촌 동생 정인이와 함께 강원도로 떠났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강원도 홍천에 도착했다. 사방이 초록색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곳에 잠깐 머물면서 내 마음도 푸르른 자연의 색으로 물들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짐을 챙겨서 좁고 긴 길을 걸어 올라갔다. 오랜만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긴 테이블 위에 놓인 다과를 먹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고, 안경을 쓰고 머리칼이 꼬불꼬불한 어떤 중년 남자가 앞에 섰다. 이시형 박사였다. 본인 소개를 하면서 ‘힐리언스 선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잠깐이라도 외부와 차단하고, 온전히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한 장소였다. 당연히 핸드폰과도 거리 두기를 해야 했다. 

 각자 머물 숙소의 키를 받았고 짐을 옮겼다. 1인 1실이다. 정말 좋았다. 늘 동생과 방을 썼던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어떠한 방해 없이 나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기대되었다.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하늘이 보인다. 오늘 밤 이 자리에 누워 강원도의 별빛을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반짝이는 그 빛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상상을 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식당으로 갔다. 밥 먹는 법을 설명해주셨다. 과일 몇 조각을 먼저 먹고 식사하라고 하셨다. 몇 조각 되지 않는 과일과 생채소를 15분, 그 이후에 차려진 밥 15분. 총 30분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했다. ‘빨리빨리’에 익숙했던 밖의 세상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느긋하게 오랜 식사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느린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덕분에 마음의 여유가 살짝 생겼다. 첫날은 ‘느림’의 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둘째 날이 되었다. 입소 전에 MBTI 검사를 했다. 그 결과에 따라 같은 부류의 사람끼리 모여 앉았다. 난 당연히 'I'였다. 말 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다들 조용했다. 입을 여는 데 걸린 시간이 다른 조에 비해 상당히 오래 걸렸다. 침묵의 조였다. 모두 누군가 먼저 입을 떼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우리 조에서도 말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서로 이름이라도 이야기할까요?”

 그렇게 우리는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이름과 나이만 말하고 나니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났다. 각 조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똑같은 시간을 줬는데 다른 조는 이미 친구, 언니, 오빠, 형이 되어 별별 이야기를 다 나눴다. 한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각 조의 소개를 마쳤고, 조별 주제 토론, 백지 채우기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우리는 신중했고 느렸다. 저기 벽 너머 있는 사람들은 시끄러웠고 모든 활동이 우리보다 빨리 끝났다. 조별 과제를 끝내고 서너 시간 동안 기록한 A1 크기의 전지를 강의실 앞쪽에 붙였다. 흥미롭다. 여백의 미를 보여준 우리. 촘촘하게 적고도 공간의 부족함을 보인 그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인 20여 명의 사람들과 계획되어 있는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였다. 아침 명상, 맨발 트레킹, 요가, 포크댄스 등. 젊은이들이 모인 요양원의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좋았다.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하는 나의 삶과는 다르게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 이곳 생활이 신선했다. 서두르면 안 되는 이 공간이 나하고는 찰떡궁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그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직업, 경제적 능력부터 달랐다. 나와 다른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공부하는 이유도 명확했고, 자신의 미래 모습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 나에게 없는 꿈이 그들에게는 존재했다. 궁금증이 다 풀리기 전에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야 했고, 서울에서 다음을 약속했다. 

 이태원에 있는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난 이태원 거리 자체가 처음이었다. 나에겐 낯선 그곳이 그들에겐 익숙했다. 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어두컴컴한 큰 방에 들어갔고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그동안의 근황을 묻고 답했다. 한창 이야기 나누던 중 어떤 키 큰 남자가 연기가 폴폴 올라오는 야리꾸리한 색상의 물이 담긴 병 하나를 들고 왔다.

 “누나도 해봐.”

 물담배였다. 나이 스무 살 넘어 처음 접해본 물담배. 외국에서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마약은 아니라면서 나에게 권했다. 나는 거절했고, 그들은 그 병을 돌려가며 호스를 통해 나오는 연기를 들이마셨다.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용히 앉아 그들을 바라봤다.

 “누나는 말을 안 하면 아나운서야. 되도록 입을 다물고 있어. 입을 떼면 백치미? 약간 그래.”

 어둡고 시끄러운 공간에도 눈앞 상황에도 적응하지 못하며 어리둥절하고 있는 내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갑자기 훅 내뱉은 그의 말에 내 눈은 커졌고 내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서로 멀어졌다. 백치미라니! 그의 눈에는 내가 멍청해 보였던 것일까. 사촌 동생이 그 자리에 왜 가냐고 가지 말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졸음이 몰려오는 이 새벽 별로 내키지 않는 이곳에 앉아 기분 더러운 말을 듣고도 가만히 앉아있는 나를 속으로 꾸짖었다.

 그리고 그들을 또 만났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 인연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들과 시간을 공유하고 싶었다. 영아는 그런 나를 나무랐다. 

 “언니가 그 사람들을 만난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야.”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만나고 싶었다. 아니, 만나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올림픽 경기장으로 갔다. 공연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우가 물었다.

 “누나도 OOO 좋아해?”

 그의 물음에 순간 움찔했다. 누군지 몰랐다. 태어나서 그 사람의 노래를 들어보기는 했을까. 금발 외국인이 부르는 노랫말을 이해할 수는 있을까.

 “아니. 누군지는 몰라. 근데 그냥 궁금해서.”

 솔직하게 답했다. 그 답을 들은 내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공연장을 채운 악기와 노랫소리, 그리고 팬들의 함성. 모두가 격하게 즐길 때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힘들게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낸 10만 원, 그리고 이곳에서의 서너 시간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각자 가야 할 길로 돌아갔다. 나 또한 대학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으로 돌아왔다.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어 내 기억 속에 계속 맴돌고 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그 말. 

 “나 이제 입 좀 열어도 될까?”     

작가의 이전글 피아노 덮개의 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