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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몰라 Dec 25. 2023

열 가닥만 뽑아줘, 제발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

 그들과 다른 내 모습에 주눅 들고,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신경 쓰며 살고 있는 내가 싫다.


 “아란. 미용실 좀 다녀와. 머리가 그게 뭐야. 혹시 돈 없어서 그래?”

 “네? 아…. 어떻게 아셨어요? 저 돈 없어서 미용실 못 가요. 차장님이 돈 좀 주실래요?”

 “진짜? 진작 말하지. 내가 돈 줄게.”

 “네. 많이 주세요. 여자들 미용실 가면 돈 30은 금방인 거 아시죠?”

 사무실 자리에 앉아 기계처럼 도면 그리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 시공팀 박 차장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더니 내 자리에 와서 나의 정수리를 보며 말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무시하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진심은 아니었다. 내가 그 사람한테 돈을 받아 미용실에 갈 이유는 없었고, 남에게 손 벌릴 만큼 내 생활비가 부족하지 않았다. 그는 진심이었나 보다. 갑자기 사라지더니 파란색 종이가 두둑하게 담긴 하얀 봉투를 내 책상 위로 툭 던졌다. “미용실 꼭 다녀와라.” 하면서.

 키보드와 마우스에 올려진 양손이 멈칫하면서 내 뇌도 정지 상태가 되었다. 말을 해야 하겠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사람 미쳤나 봐.’ 정지된 뇌를 살리고 정색하며 말했다.

 “가져가세요. 필요 없어요.”

 소용없었다. 그 인간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책상 위에 놓인 봉투를 손에 쥐고 쫓아갔다. ‘이 인간이 진짜. 지가 뭔데 나한테. 참나.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지나 잘할 것이지.’ 나도 똑같이 책상 위에 돈 봉투를 툭 내던졌다.

 “제가 불쌍해 보여요? 제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차장님한테까지 돈 받아 가며 미용실은 안 가요.”


 10대 때부터였다. 백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처음에는 잘 숨어있더니 어느 순간부터 너나 할 것 없이 손들며 밖으로 나왔다. 매일 밤 책상 위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고 눈에 보이는 하얀색 머리카락을 뽑아야 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는 새치는 동생들에게 부탁했다.

 “제발 열 가닥만 뽑아줘. 소원 들어줄게.”

 간절했다. 머리숱이 많아 참 다행이었다. 20대부터는 뽑는 것으로는 어림없었다. 아이를 낳고 났더니 이제는 검은색 머리카락 찾기가 어려워질 정도가 되었다. 다들 한약 잘못 먹었냐고 묻지만, 난 원인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랐다. 

 검은콩도 먹어보고 백수오도 먹어봤다. 헤어 마스카라도 발라보고 흑채도 뿌려봤다. 그렇다고 흰머리가 가려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매달 미용실에 가는 일뿐이었다. 이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매달 5만 원 넘게 지출해야 했고, 평균 2시간은 할애해야 했다. 염색 후 일주일은 두피가 따갑고 간지러웠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해야 했다. 어쩌면 이 화학약품이 내 몸의 어딘가를 망가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이겨내면서까지 검게 물들여야만 했다. 

 사람들은 늘 말한다.

 “아란, 염색 좀 해.”

 눈에 보이는 신체적 결함을 숨기고 싶다는 나의 마음을 그들은 모를까? 나도 알고 있다. 그들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염색 시기를 놓치고 누군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는 항상 자신감이 없었다. 그들의 시선에 내 몸은 움츠러들었다. 대부분 사람의 눈동자는 내 눈이 아닌 나의 머리에 머물렀다. 이해는 한다. 젊은이의 머리카락 색이라고는 믿기 어려우니까. 한참 구경을 마치고 내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색한 웃음과 함께 금세 시선을 돌렸다. ‘놀라셨죠? 저도 놀라요.’ 내가 내 머리카락에 신경 쓰느라 대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당당하지 못한 내가 답답하다. 그런데 어쩐담. 그냥 그게 나인 것을.

 그때마다 생각했다.

 ‘머리털 없이 살 수 없을까? 싹 밀어버릴까? 가발 쓰고 다니면 되잖아. 여름에는 어쩌지? 땀띠 나는 거 아니야? 바람에 벗겨지면 어떡해. 으악. 끔찍해. 안 돼. 안 돼. 그럼 그냥 백발로 다녀? 강경화 봐봐. 멋스럽잖아. 국민 앞에 당당하잖아. 아, 아니다. 강경화니까 멋스러운 거지. 내가 그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그래. 어쩔 수 없다. 내 팔자다.’

 결론은 늘 똑같으면서도 머리를 굴려보고 또 굴려본다.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늘 나의 새치를 뽑아주던 동생이 이제야 날 이해해 준다. 

 “언니, 나는 언니가 그 하얀 머리 때문에 남들 눈치 보는 거 정말 이해가 안 됐거든? 아니 그게 뭐라고 왜 저렇게까지 신경 쓰나 했어. 근데 지금은 좀 이해가 돼. 내가 새치가 생기니까 너무 짜증 나. 언니 진짜 힘들었겠다. 어렸을 때부터 났잖아.” 

 맞다. 난 늘 그랬다. 남들이 나의 하얀 머리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느라 신경 쓰였고 괜히 내가 작아졌다. 스트레스 때문에 생겼을지도 모르는 새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그만 신경 쓰고 싶다. 남들이 나를 그렇게 쳐다보든지 말든지. 내가 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속으로 외쳐본다.

 ‘저기요. 제 머리카락 색깔이 빨갛든, 파랗든, 신경 꺼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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