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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몰라 Dec 31. 2023

비밀로 하길 잘했어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

 신데렐라, 혹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내 앞에도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허황한 꿈을 꾸던 내가 그와는 전혀 다른 현실적인 남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시작은 꽤 자연스러웠다. “우리 사귈래?”라는 말도 없었다. 그냥 서로의 눈빛을 보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었나 보다.

 이 새로운 사실을 대학 동기 나윤이에게 제일 먼저 알렸다.

 “저기, 있잖아. 할 말 있어. 음….”

 한참 뜸 들였다. 이상하게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떨어지기 힘들어했다. 나윤이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을 해. 뭔데?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빨리 말해봐.”

 “남자친구가 바뀌었어. Y 과장. 기억나?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윤이는 쉬지 않고 말했다.

 “뭐? 그러면 성호는? …… 아니 근데 왜? 그 남자 뭐가 좋은데? 그래. 연애니까. 맘껏 연애해. 연애는 할 수 있지. 근데 네가 결혼한다고 하면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거야. 나에게 그 정도의 권리는 있지? 도시락 직접 만들기는 어려워도 사 들고는 쫓아다닐 수 있어. 그러니 지금은 실컷 즐겨.”

 나윤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 남자를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내 나이 26살. 그는 34살. 그 사람과 관련된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일단 나이부터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그의 지인들은 그를 ‘도둑놈’이라 불렀고, 내 친구들은 나를 ‘미친년’이라 불렀다. 이 사람이 좋으면서도 나 또한 부끄러웠을까.


 “회사에는 비밀로 할래요?”

 내가 먼저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사내 비밀연애는 퇴사하고도 결혼 전까지 계속되었다.


 여름이었다. 회사 언니들과 연락을 주고받다 갑자기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어느 바닷가 근처 펜션. 우리는 숯 향을 맡으며 불에 살짝 그을린 고기를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펜션 사장님은 상추도 같이 먹어야 한다며 넓은 쟁반 위에 상추와 깻잎을 한가득 가지고 오셨고, 옆 테이블에 있는 남자 셋과 같이 먹고 마시며 노는 것은 어떠냐고 물으셨다.

 “아란, 어때?”

 두 언니의 눈은 나에게 향했다.

 “네? 그냥 셋이 먹어요. 언니들은 남자친구도 있으면서….”

 “야야. 네가 없잖아.”

 그랬다. 이 언니들은 내가 숨겨둔 Y 과장님의 존재를 몰랐다. 셋 중 한 명 고르고 신호를 보내라며 사장님을 불렀다.

 의도와는 다르게 난생처음으로 모르는 남자들과 ‘합석’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사장님은 젊은이들이 이렇게 시간 내서 여행 다니는 것을 응원한다며 술이 부족하면 언제든 냉장고에서 꺼내 먹으라 하셨고, 자리 배치도 변경해 주셨다. 낯가림이 심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나는 우리 셋이 웃고 떠들던 좀 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들 모두 서울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언니들은 그중 한 명과 나를 엮으려고 노력했다.

 “이 친구는 남자친구 없는데 어때요?”

 난 말없이 잔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홀짝홀짝 마셨다.


 이렇게 나는 7년을 버텼다. 연애도 못 하는 맹꽁이로 살았다. 소개팅해준다고 하면 거절했고, 언니들이 남자친구를 소개해줄 때 내 옆자리만 텅 비어있었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그대들도 다 아는 사람이에요.”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당당하지 못했다.

 내가 선택한 이 연애에 대해 잘못되었다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웠던 것일까. 숨길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결혼을 앞두고 청첩장을 전달하기 위해 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퇴사 후에도 주기적인 만남을 하는 첫 회사 언니들과의 단톡방에 ‘공지’ 글을 올렸다.

 “저 결혼합니다.”

 난리가 났다. 혹시 요즘 유행하는 혼수 장만이 된 것이냐며 단톡방의 열기는 뜨거워졌다. 하긴 연애를 안 하던 애가 결혼이라니. 그들로서는 충분히 상상할 만한 일이었다. 임신은 아님을 밝혔고, 남자는 청첩장 주는 날 공개하겠다고 했다.

 봄이라 부르지만 아직은 쌀쌀한 주말 저녁 을지로 참치 횟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낮에 결혼 준비한답시고 바쁘게 다녔더니 좀 늦었다. 얇은 창호지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들이 내 옆에 서 있는 Y 과장님을 보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잔뜩 힘이 들어간 손으로 문을 옆으로 밀며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다들 말없이 우리를 쳐다봤다. 갑자기 고요해졌다. 수정 언니가 정적을 깼다.

 “Y 과장님도 초대한 거야? 둘이 그렇게 친했어?”

 “네, 아주 친하죠. 저랑 결혼할 남자예요.”

 “뭐? 일단 앉아봐.”

 Y 과장과 나는 방 한가운데 앉았다. 그때부터 질문이 쏟아졌다. 대답할 틈도 없었고,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왜?”

 “도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된 거야?”

 “왜 말 안 했어?”

 “둘이 어떻게 만난 건데?”

 “아란이 회사 1년 다니고 그만뒀잖아. 둘이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잖아.”

 “도대체 왜?”

 “둘이 진짜 결혼한다고?”

 “아란아, 하지 마.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많단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앉자마자 시작된 그들의 조사에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일단, 음식부터 주문하자 했다. 음식을 주문했고 안주가 준비되기 전 서로의 잔을 부딪쳐 가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퇴사하기 5~6개월 전부터 연애하기 시작했고, 특별한 계기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남자친구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부모님께 소개하듯 차근차근 이 남자에 대해 설명했다. 언니들은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참 잘 숨겼다고 하면서 왜 말하지 않았냐고 아쉬워했다. 알았다면 더 좋은 남자 소개해줬을 거라면서. 모든 소개팅 거절해서 ‘남자한테 관심 없는 워커홀릭’인 줄 알았다며 그래도 이렇게 결혼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격한 축하 인사로 마무리가 되어 괜찮은 듯 보였지만 괜찮지 않았다.

 그때는 남자친구였고, 지금은 남편인 그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만약 우리의 연애 사실을 알렸더라면 우린 오늘, 이 청첩장을 나눠주지 못했을 것 같아. 비밀로 하길 잘했어.”

 당연하다고 답했고, 그러니 나한테 평생 잘하면서 살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우리가 남들에게 비밀로 하면서까지 만나야 했던 것일까. 우리 둘의 관계로 그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고,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나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 어떤 남자보다 나에게만큼은 훌륭한 동반자였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리는 천생연분 찰떡궁합 부부이다. 나이 많은 이 남자, 왜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함께 있으면 편하고, 내 부족함을 채워 주는 사람이니까. 그는 내가 하는 일을 언제나 응원해주니까. 늘 힘이 되어준는 사람이다. 딸에게는 얼마나 좋은 아빠인지…. 딸 바보인 이 사람이 가끔 짜증 나지만 그래도 좋다. 그렇게 남들이 뜯어말리던 우리는 잘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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