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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몰라 Feb 06. 2024

야! 그럼 내 인생은?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1년. 15개월 힘들고 또 힘들었던 기간이었다. 머리는 늘 부스스했고, 아기 침으로 얼룩지고 늘어진 셔츠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은 볼품없었다. 하루빨리 옷걸이에 걸린 하얀 셔츠와 검정 슬랙스를 입고, 숨 막히는 2호선에 탑승하고 싶었다. 시간은 어김없이 지나갔고 복직일이 다가올 무렵, 엄마에게 연락했다.

 “엄마! 나 곧 복직인데 꿀꿀이 봐줄 수 있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연하다고 답했고, 어린이집은 보내지 말자고 하셨지만, 나로서 그럴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엄마에게 숨 쉴 틈을 제공하고 싶었다. 


 그렇게 회사로 돌아갔다. 1년 만에 미용실로 가 새치를 가렸고, 새롭게 장만한 새 옷을 입고 조용히 출근 준비를 했다. 꿀꿀이가 깰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오래 묵힌 구두 소리가 경쾌했다. 또각또각. 신도림역은 언제나 그랬듯 북적북적했다. 그래도 좋았다. 나 혼자 지하철 한구석에 서서 바라보는 한강은 유난히 빛났다. 저 멀리 떠오르고 있는 주황빛은 나에게 환영 인사를 해주는 듯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저 복직했어요.”

 ‘목석 김몰라’라고 불리던 내가 밝은 모습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대표님 비서실에 연락했다. 복직했으니 대표님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다고. 난 7년째 사원 꼬리표도 떼지 못한 일개 말단 사원이었다. 그런 내가 대기업 대표를 만나겠다고 연락했다. 그런데도 반갑게 맞아 주셨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회사에 있는 제도 잘 활용하면서 일을 놓지 말라고 응원해주셨다. 그 응원이 힘이 되었고 내가 좀 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순조롭게 2017년을 맞이했다. 마냥 좋았다. 무엇을 시키든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이 잠깐이나마 주어진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이 행복은 나만 느꼈다. 매일 아침 엄마를 찾으며 우는 딸과 그런 딸을 달래느라 땀 한 바가지 쏟은 후 출근했던 남편, 낮잠 안 자고 종일 울고 있으니 데리고 가라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가야만 했던 우리 엄마. 그들은 매일 전쟁 중이었다. 그래도 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그렇게 내 행복만 찾으면서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조심스레 물으셨다. 

 “혹시, 양 서방 일이 좀 어렵니?”

 “응? 무슨 일?”

 “아니. 혹시 양 서방 벌이가 시원찮냐고.”

 “아…. 몰라… 나 양 서방 얼마 버는지 몰라.”

 진짜 몰랐다. 결혼 전에 물었지만, “백 원.”이라고 답하는 그에게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술도 즐기지 않고, 씀씀이가 크지도 않은 사람이라 알아서 잘 관리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우리 엄마는 아니었다. 

 “뭐? 몰라? 어떻게 몰라? 내가 물어봐? 그럼, 너희 형님들도 다 일 안 하는데 양 서방한테 좀 더 벌어오라고 하면 되겠네. 너는 꿀꿀이 보고. 꿀꿀이 잘 키워야 하는 아이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엄마, 꿀꿀이 잘 자라고 있어. 내가 보기엔 괜찮아. 그리고 나 돈 없어서 회사 다니는 거 아니야. 나도 내 인생이 있어. 엄마처럼 자식에게 희생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나한테 강요하지 마.”


 “야! 그럼 나는? 내 인생은?”


 “…….”


 엄마의 질문에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나 참 이기적이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던 엄마가 답답했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 인생 좀 살라고 말했다. 그래 놓고 당연하게 내 아이를 엄마에게 맡겼고, 정작 엄마의 삶은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 생각했다. 내 얼굴이 붉게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미안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 옵션이 있었다. 꿀꿀이를 종일반에 맡길 수 있었고, 도우미 이모님을 구해도 됐다. 육아기 근로 시간 단축제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오전에는 어린이집에 맡기고, 오후에는 우리 엄마가 봐주시면 되지.’


 다른 선택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오랜 시간 어린이집에 두자니 내 딸이 안쓰러웠고, 이모님을 구하자니 혹시나 아이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까 불안했다. 


 예전에 나눴던 남편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오빠, 만약 꿀꿀이가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 봐달라고 하면 어쩌지?”

 “뭘 어째. 봐줘야지.”

 “그래? 난 자신 없는데. 나 내 노후 즐겨야 하는데.” 


 이런 말을 했던 내가 정작 우리 엄마를 외면했다. 그때는 내가 살아야 했다. 누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이렇게 인정머리 없고 싹수없는 딸. 딸로서도 엄마로서도 형편없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엄마 옛 사진을 찾아봤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몇 년 사이 많이 늙었다. 출산예정일이 한참 남았을 때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내 친구들 손주 보느라 폭삭 늙었더라. 난 못 봐준다.”

 ‘네, 저도 어머님께 맡길 생각 없어요.’

 그냥 웃고 말았다. ‘굳이 뭐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왜 하실까?’ 했는데 의문이 풀렸다. 어머님이 현명했던 거다. 앞으로 펼쳐질 일을 예상하셨기에 미리 차단했다. 그런 어머님이 야속하면서도 그러지 못한 우리 엄마가 바보 같았다. 그런데도 엄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40년 넘게 남편과 딸 셋을 위해 살아왔던 엄마가 이제는 손녀딸을 위해 엄마 삶의 일부를 내어 주길 바랐다. 어쩌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던 나를 용서해 주기를. 

 “엄마, 정말로 미안해. 그리고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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