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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바람 Jan 29. 2024

1월 면접 시즌에 운명의 학원을 만나고 싶다면?

영어 강사여 일자리를 구하라, 1월이다. '속도'와 '인내'를 명심해라.

 사람을 사귈 때 MBTI 얘기가 나오면 나는 나를 INFP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나는 즉흥적인 활동을 한다는 P임에도 2년 앞 계획을 세우고 일어나면 숟가락 다음으로 캘린더를 잡는 지독한 계획형 인간이다. 올해 윤석열 나이로 스물 여섯인 내가 계획형 인간인 것은 유전자때문에 타고난 결과가 아니다. 순전히 학원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 보니 학습된 J가 되었다.



 

 모두가 날씨 얘기로 친목을 다지던 1월 중순 겨울이었다. 손을 주머니에서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추웠지만 하늘만큼은 맑고 화창했다. 시선을 내리고 버스 정류장을 보는데 어쩐지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럴 순 없었다.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각할 것 같던 나의 예감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일단 전날 잠을 잘 못 잤다. 면접에 꼭 합격해야 한다는 압박감때문이었다. 눈을 감은 상태로 수천 가지 생각이 흐르고 날이 밝았다. 

 도전할 때 나는 언제나 도망갈 구멍을 열어 놓곤 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오늘 불합격해도 다음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자기 합리화했을 것이다. 3월까지 시간이 남았다고 꽤 많은 학원들이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영어 강사를 찾고 있는데 그 중 한 곳만 만나 계약하면 된다고 생각해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서두르고 있었다. 60개 학원들의 모집 공고를 읽었고, 내가 설정한 조건과 일치하는 7개 학원에 똑같은 이력서를 냈다. 7개 학원 중 2 곳에서 연락이 왔고 결국 나는 그 2 곳을 목요일과 토요일에 방문하기로 했다.

 두 학원 사이에서 나는 바람둥이처럼 행동했다. 짧게 통화를 나누었을 뿐이지만 두 학원 원장님들의 성향은 비슷했다. 첫째, 두 분은 3월에 일할 강사를 한 달 전에 모집할 만큼 계획적이었다. 그리고 둘째, 괜찮은 강사를 구할 수 있다면 그들의 시간을 기꺼이 투자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사실 이런 원장 님들이 흔하지는 않았다. 중간에 만난 어떤 원장 님은 당장 일할 수 있는 강사가 필요하다며 강사가 부족해 원장인 자신이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현실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녀가 했던 큰 실수는 대화에서 자신이 무엇이 필요한지만 말한 것이다.

 영어 학원 강사가 일자리를 구하는 단계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이력서다. 이 단계에서 강사는 자신이 얼마나 영어를 잘하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주로 시험 성적이나 테솔 자격증 그리고 대학 전공 등을 깔끔하게 정리하면 된다. 두 번째 단계는 면접이다. 처음에 들으면 시험 성적을 얻는 것에 비하면 면접이 쉽게 느껴질 텐데, 현실은 면접도 만만치 않다. 도대체 무엇을 준비해가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면접이란 전투는 원장에게서 연락을 받은 시점부터 벌어진다. 나는 세 통의 연락을 받았고, 나랑 성향이 맞는 두 분과 면접 약속을 잡았다. 면접 약속을 잡을 땐 그 두 학원에 똑같은 말을 했다. 

 원장 : 언제 볼까요 선생님?


 나 : 저는 원장 님을 빨리 뵙는 편이 좋은데…

 이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서두르고 있었다. 많은 강사들이 이동하는 1월이었다. 모두가 알 만한 대형 학원들은  경쟁자가 마흔 명까지 찼다. 꾸물거리다간 먼저 면접을 본 사람이 채용돼 면접도 보지 못하고 낙방할 수 있었다. 그건 학원 쪽도 마찬가지였다. 목요일 학원에 합격이 확정되자 마자 나는 토요일 학원에 이 소식을 알렸다. 내가 빨리 뵙고 싶다는 의사를 알렸을 때, 토요일 학원은 학원 일정이 바빠서 15일 정도 후 주말에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사이 수요일 학원의 연락을 받았다. 똑같은 말을 했을 때 수요일 학원 원장은 웃었다. 약속은 그 주 평일로 잡혔다. 그리고 더 서두른 학원이 나를 가졌다. 

‘알겠습니다 선생님.라는 문자가 토요일 학원에게서 왔다.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하늘을 보았다. 집에 못 돌아갈 만큼 어지러운데 메가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 앉을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허기가 져서 손바닥만한 마카롱을 해치운 후 다시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세상에 내가 1년 계획을 이룬 것이다. 감격해서 울고 싶었다. 실제로 나는 1년 동안 많이 울었다. 다행히 목표를 이뤄 행복해야 할 날에는 울지 않았다. 




 참 다행이었다. 운명이 결정된 그 주 목요일 직전까지만 해도 나는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극도로 불안했다. 나는 서울의 영어 학원들이 내가 유학을 가서 교포라도 되어야 내가 원하는 조건 ‘주 20시간, 월급 160만 원’을 내줄 거라는 착란에 시달렸다. 

 내가 유학을 간다면 (갈 능력도 없지만) 왜 굳이 귀국해 서울에 일자리를 얻겠는가. 정작 교포 선생님들도 불가피한 이유로 귀국한 사람들이 다수였다. 북아메리카에서 교양 있게 살 수 있었다면 서울에 오지 않았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고작 최저 임금 웃도는 월급을 주면서 토익 950점을 요구하는 학원들을 채용 사이트에서 보다 보면, 그 두 배의 보상을 원하는 나는 교포급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에 나는 자기소개서로 나를 보여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나는 글쓰기를 잘했고 한때 자기소개서로 학원들의 러브콜을 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력서를 작성하며 채용 사이트를 둘러 보는 중에 부정적인 감정에 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이 자기소개서에 담겼다. 나에게 강사가 없어 출근해야 한다고 하소연한 원장처럼 나도 원장들에게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 그런 글을 읽은 학원들에게선 응답이 없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밤에 진정한 상태로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 똑같은 이력서에서 자기소개서만 빼 버렸다. 그러자 내 이력서에는 다정한 인사 한 마디 없이 스펙만 남았다. 나는 가만히 내 스펙을 읽었다. 스펙이 문장도 아니고 스펙을 읽다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사람의 표정에서 감정의 기류를 읽는다. 어떤 사람은 경제 기사의 숫자에서 기업의 미래를 읽는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 그리고 나는 내 지원서를 받을 학원이 내 스펙에서 1년 간 내 노력을 읽어 주길 바랐다. 

 그 스펙은 지난 1년간 나를 불가능 직전까지 내몰았던 나의 완벽주의가 남긴 흉터였다. 그런 이야기를 내 스펙에서 읽어 주기를 바랐다.

 내 바람이 통했다. 목요일 원장이 물었다.

 “학교는 몇 시간 정도 다녀요?” 나는 미래의 비즈니스 파트너에겐 진실해야 한다는 가치관에 따라 대답했다. “사이버 대학교라 일주일에 9시간만 투자하면 돼요.” 그녀가 나를 바라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아아. 그래서 가능했구나.” 나는 그 반응에서 그녀가 내 스펙을 믿을 수 없어 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다른 학원에서 경력 1년을 채우면서 학교 생활을 했다. 동시에 오픽 시험을 봤고 테솔 자격증을 땄다. 주말에 공부했고, 학원 방학에 공부했고, 추석에 공부했다. 데이트 한 번 못했다. 불가능에 닿으려면 미쳐야 했다.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은 하고 싶은 게 많은 것 같아요.


 그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나에 관한 객관적인 분석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칭찬으로 생각하려 한다.


 우리 학원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나는 내가 이직에 성공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그 성공에는 필연이 있었다. 위의 이야기에 등장한 그 필연을 나는 두 가지로 정리하겠다. 첫 번째, 나는 달려야 할 타이밍에 누구보다 서둘렀다. 만약 내가 학원 한두 곳만 지원했다면, 만약 내가 면접 준비를 한다면서 삼 주 뒤로 면접 날짜를 잡았다면, 만약 내가 학원 면접이 최우선 순위라는 걸 원장님께 보여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채용 사이트를 들여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내가 준비한 이력서는 1년 계획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중간 중간에 상황에 따라 계획을 변경했기에, 최종 완성된 이력서가 처음에 구상한 이력서와 일치 하지 않는 부분이 많긴 하다. 그러나 분명 1년 동안 노력한 시간과 만난 인연들로 채운 소중한 내 기록이었다.

 지금 나는 2025년 계획을 윤색하느라 바쁘다. 2025년 계획에도 이 필연의 두 요소, 속도와 인내를 심어 두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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