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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죰 Jun 13. 2016

04.
스톡홀름 시청사

2016. 5. 16  - 1. 스톡홀름 시청사 가이드 투어


# 2016. 5. 16  쿵스홀멘섬 조깅

새벽 다섯 시, 눈이 번쩍 떠졌다. 5월의 스웨덴에서는 해가 워낙 일찍 뜨기 때문인 탓도 있지만 7시간이나 느린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서다. 평소 아침잠이 많은 내게 새벽 기상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새벽녘 Kungsholmen 섬의 교차로

무작정 운동복을 입고 아직 이슬비와 새벽 공기가 내려앉은 동네를 뚫고 나섰다. 해가 떴지만 워낙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새벽인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스톡홀름 자체가 서울과 비교도 안될 만큼 인구밀도가 낮은 도시인 건 사실이다. (하기야 서울은 단위면적 인구밀도로 치면 세계 최고가 아닐까) 스톡홀름에는 서울 인구의 10분의 1이 채 안 되는 90만의 사람이 모여 산다. 또, 스톡홀름은 육지 도시가 아닌, 바다 위 여러 개의 섬과 반도가 다리로 연결되어서 대도시를 이루고 있는 형태다. 내가 지냈던 Kungsholmen 지역도 결국 다리로 연결된 작은 섬(마치 여의도와 같은 섬)이다.


대충 한 시간 동안 동네 지리를 익히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돌아오니 여전히 아침 6시 반.

지난밤 잠을 설치게 한 다소 불편했던 침대 때문에 별 기대를 안 했는데, 놀랍게도 일찍 찾아간 호텔 조식은 아주 풍성했다. 만족스러운 아침식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호텔에서 제일 마음에 든 부분이었던 조식! 

배가 부른 채로 호텔을 나서니 오전 9시 반이 조금 안되었다. 호텔 바로 앞에서 City Centrum으로 향하는 50번 버스를 타고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명소, 스톡홀름 시청으로 향했다. 


강을 마주 보는 자리에 호젓하게 위치해있는 스톡홀름 시청사는 스톡홀름에서 꼭 봐야 할 주요 볼거리로 소개된다. 그런데 기대만큼 스톡홀름 시청사의 외관은 화려하진 않은 편이었다. 어둡게 바랜 벽돌로 덮여있는 시청사는 우중충한 날씨 덕분인지 하늘빛 종탑을 제외하면 랜드마크가 아니라 어딘가 감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단조로웠다.


 

시청사 테라스 너머 보이는 스톡홀름의 구시가지, 감라스탄(Gamla Stan).

탁 트인 강변을 구경하겠다고 시청사 바깥 구경을 하다가, 너무 쌀쌀한 날씨 때문에 실내로 곧장 들어왔다. 한참을 기다렸을까. 투어를 시작하는 오전 10시가 되자 투어를 알리는 쨍한 귀여운 종소리는 낮은 웅성거림을 멈추게 했다. 작은 종을 들고 서있던 투어의 진행자는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보이는 검은 머리의 동양인 여성이었다. (이런 다양한 인종의 국민이 모여사는 스웨덴이 부럽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시 스쳤다.) 그는 스웨덴 억양이 남아있는 능숙한 영어로 어딘가 시선이 불안해 보였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나의 영어가 악센트가 너무 독특하거나 목소리가 작아서 들리지 않으면 얼마든지 손을 들고 넌지시 알려달라."

라고 말하는 그녀의 음성은 유럽에서 들었던 그 어떤 가이드의 음성보다 또렷했고 이해하기 쉬웠다. 정말 보기 드물게 겸손한 가이드였다.




# 2016. 5. 16  스톡홀름 시청사(Cityhall)의 4가지 관람 포인트

가이드가 워낙 방대하고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기에 모두를 설명할 수 없지만, 몇 개의 포인트가 내게 가장 와 닿았다.


1. 극명한 공간감과 빛의 대비 효과

투어를 시작하는 로비 공간은 천정이 아주 낮고 어두웠다. 왠지 롯데월드의 지하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공간같이 숨이 막히고 음습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가이드를 따라가 연회장(Blue Hall)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탁 트인 천정이 주는 공간감과 빛의 극명한 대비가 누구나 저절로 탄성을 지르고 천정을 응시하게끔 한다. 이는 건축가가 연회장에서 오랜 시간 대기했을 사람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선사한 재미 요소라고 한다.


2. 파란색을 찾을 수 없는 '블루홀'

 매년 12월 노벨상 수상 연회가 열린다는 Blue Hall은 이름과는 정반대로 푸른색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붉은빛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왜 그런고 하니, 시청을 설계한 건축가 라구나르 오스트베리가 이 방의 설계도를 공개했을 당시에는 벽을 푸른색으로 메울 생각으로 'Blue Hall'이라는 명칭으로 공식적으로 못 박아버렸단다. 그런데 공사를 하던 중 붉은색 벽돌로 벽을 채우고 나니 굳이 푸른색을 덧씌우지 않아도 그 자체로 더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에 그대로 두게 되었고, 결국 이 공간은 조금도 푸른색을 찾을 수 없는, 붉은 빛의 'Blue hall'이 되어버렸다.


3. 여성 친화적 계단 

블루 홀(Blue Hall)의 연회장 계단 모습.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넓적한 계단은 공주들이 오르내리기 편하게 설계되었다.

블루홀에 들어서면 어릴 적 동화책 또는 디즈니 영화에서나 보던, 화려한 공주가 우아하게 내려올 것만 같은 연회장 계단이 눈에 띈다. 계단을 올라갔다가 내려와 보면 유난히 걷기에 편한 기분이 드는데, 계단이 단순히 넓적하고 예뻐서만은 아니다. 건축가는 이 계단을 타고 연회장으로 내려올, 바닥이 끌리는 긴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는 여성들(주로 공주나 귀족 여성)을 위해 특별히 계단 면을 넓적하고 안으로 기울어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설계 당시 건축가가 자신의 부인에게 긴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기고 여러 번 오르내리게 하며 고안한 노력의 산물이다. 역시 훌륭한 UX 디자인은 유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중요하다는 생뚱맞은(?) 교훈을 다시금 실감한다.


4. 검소한 나라의 '금으로 칠갑된' 방


 Golden Room은 이름 그대로 금으로 번쩍번쩍 빛이 나는, 스웨덴 시청사에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공간이다. 그런데 가이드에 따르면 이 방은 처음 공개되었던 당시 스웨덴인의 원성을 샀다고 하는데, 그 기원을 살펴보면 '라곰'(적당함)을 추구하고, 불문법 '얀테의 법칙'(튀지 않음을 미덕으로 함)에 영향을 받은 스웨덴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방 중앙에는 스웨덴 국가를 상징하는 여신이 프랑스 에펠탑,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등에 둘러싸여 있는데, 마치 스웨덴이 '세계의 중심인 양 구는 게 쓸데없이 잘난 체 하는 것 같아서' 스웨덴인 사이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우세했다고 한다. 

'라곰' (Lagom) : 직역하자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함'. 우리 뜻으로 말하자면 '중용'정도가 되겠다.

'얀테의 법칙'(The law of Jante) : 기독교에 십계명이 있다면, 북유럽 국가는 '얀테의 법'이라 불리는 십계명이 있다. 한 노르웨이 소설 작가가 덴마크의 한 작은 마을 '얀테'에서 통용되는 법칙을 언급했는데, 개인적 성공과 부를 쓸모없고 부적절한 것으로 묘사하고, 남들보다 더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비난한다. (미국의 자본주의에서 그리는 '성공'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면 된다.)

 또 넓은 방 전체가 금칠이 되어있어 얼마나 많은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을까 여기게 되지만, 실제로 사용한 금 양은 굉장히 적게 사용되도록 설계된 점이 인상깊다.(100kg 즈음,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넓은 방 크기에 비해 충격적으로 적은 양이었다.) 뭐든지 '과하면 안 돼!'를 외치는 스웨덴이어서 가능했던 시도였을지 모른다.


5. 양성(남성, 여성)을 강조하는 디테일

일단 여성친화적 계단에서 1차 충격을 받았는데, 시의회장에 들어가니 시의원 의석 수 절반이 여성 의원의 차지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어느 영역에서도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고무적인 수치다.) 신기한 마음에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여성 의원의 이름표와 자리를 찍었다.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던 회랑에서 가이드가 도중 길을 멈춰 세우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오른편에 있는 남색 기둥이 1열이 아니라 2 열인 이유, 그리고 기둥 모양이 원통형으로 통일되지 않고 원통형과 사각기둥형인 이유는 사회를 지지하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상징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짝수 개의 테라스 창문에도 역시 남신, 다른 창문에는 여신이 각각 같은 수로 번갈아 그려져 있었는데, 이 역시 위와 같은 이유로 건축가가 의도한 바라고 한다. 역시 될성부른 잎은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맞는 건지(...) 100년 전에 지어졌음에도 깨알 같은 디테일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를 강조하는 현대 스웨덴의 특징이 묻어나는 듯 느껴졌다.




 "첫 칭찬이 주는 힘", 시청사를 떠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이드의 설명을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스톡홀름 시청사 투어를 모두 마쳤다.

영어를 제 2 외국어로 쓰는 나로선 가이드의 말의 속도가 빠르거나 억양이 독특하면 놓치는 부분이 많았는데, 스톡홀름 시청사 가이드는 그런 점에서 여태 본 가이드 중 전달력이 단연 제일 뛰어났다. 


다만 중간에 말이 끊기면 매우 당황한다거나, 가까이서 보면 입모양이 미세하게 떨리길래 조금 의아했다.

그런데 그녀가 마무리 인사를 마치며 조심스레, 

"사실은, 오늘이 제 첫 출근 날입니다. 제가 많이 부족했더라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 그렇게 잘했는데도 중간중간 긴장한 여력이 묻어났던 게 처음이어서 그랬구나, 얼마나 긴장했을까. 하며 짠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굳이 끝난 자리에 어슬렁 머물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정말 처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제가 여태 다녀왔던 투어 중에 가장 프로페셔널한 가이드였어요. 덕분에 아주 재밌었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고맙다는 대답을 연발했다. 그럴 필요 없다며 서로 너스레를 떨고 미소로 인사를 나누다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왠지 찡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해도 유리장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하던 첫 인턴 시절,

선배가 무심코 지나가듯 말한 작은 한마디 칭찬 때문에 그동안 얼어있던 긴장과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던 때가 있었다.

그 한 문장이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는 정확히 기억도 못할 만큼 기억력이 바랬지만, 

그 말의 힘은 내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고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내 진심 어린 한마디가 그녀의 앞날에 따뜻한 격려가 되길 소망하며 시청사를 뒤로 했다. 


곧, 고요한 도시에 오전 11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스톡홀름 시청사의 정오를 알리던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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