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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죰 Jun 03. 2016

02
버킷리스트

2016. 5.15  -  러시아 상공에서

꽤 긴 비행이었으나 시간이 의외로 빠르게 지나갔다. 워낙 즉흥적으로 준비한 여행이다보니 비행기 안에서 유난히 분주하게 시간을 보낸 까닭이다.


서울을 떠난지 4시간쯤 지났을까. 비행기 밖이 어둑어둑해지면서 기내 조명등이 꺼졌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줄어들고 차분함이 내려앉았다. 잠을 청하려고 했으나 평소 잠버릇대로 자꾸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홀홀단신으로 비행기까지 탔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니 당황스럽게도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떠나기 전날 까지도 스스로 감정적으로 위태위태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항상 눈물이 머리끝까지 차있어서 누가 건들기만 해도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긴 했다. 당황스럽게도 지금, 바로 비행기에서 그만 중심을 잃었는지 계속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비행기 안에서 숨을 죽이고 나오는 눈물을 그냥 닦아내고만 있었다. 옆에 누가 있었어도 그 누구도 달래기 어려웠을 갑작스런 눈물이다.

한참 울고나니 마음 속 깊숙히 남아있는 감정을 바닥까지 긁어내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무작정 떠나왔으니 특히나 이번 여행의 방향과 목적을 정하지 않으면 그저 일주일을 의미없게 보내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바로 노트북을 켜고 먼저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이루고 싶은 것 네 가지를 정리해보았다.




1. 대학교 방문해보기 -> 성공!

얼마 전 서른살이 되기 전에 유럽에서 석사 공부를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추려진 나라가 네덜란드-스웨덴.

특히 이번 기회에 스웨덴의 대학교를 방문해 미리 석사 생활을 그려보고 동기부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웁살라대학(Uppsala University)와 스톡홀름 대학(Stockholm University) 두 군데를 방문하려고 계획했으나, 결국 웁살라에는 가지 못하고 시내 중앙과 가까운 스톡홀름 대학에만 다녀오게 됐다.


스톡홀름 대학 입구의 전경. 사회과학부가 유명하단다.


2. 스웨덴 '국회의사당 투어' 참여하기 -> 아쉽게 실패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스웨덴 의회와 국회의원'이 인상적이어서 국회 의사당에 직접 가서 '스웨덴 정치'를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물론 관광객에게 열려있는 장소는 제한적이겠지만, 그 장소에서 투어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것 만으로도 스웨덴 정치의 생생한 풍경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



그냥 시민들이 다니는 일상적 공간에 떡하니 있는 국회의사당.
의회로 통하는 문, 일반 시민과 관광객들로 북적북적해 다큐에서 봤던 것처럼 실제로 누가 의원이고 시민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의회 쪽 다리에서 본 구시가지 감라스탄 지구의 전경
감라스탄 지구 다리에서 보이는 국회의사당.

경유지 핀란드에 도착하고나서 바로 구글링해보았으나, 슬프게도 내가 스웨덴을 떠나는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반에만 투어가 있었다. 결국 아쉽게 이 목표는 이루지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성수기인 7월 1일부터 8월 30일까지는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투어에 참가할 수 있다.(정보)) 다음을 기약하며 스웨덴의 정치구조와 정당에 대해 더 공부하고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3. 북유럽 디자인 샵 방문해보기 & 이케아 방문하기 -> 성공!

북유럽 하면 '디자인'!

한국에서 내가 그동안 봐온 북유럽 디자인이라고 하면 흔히 무채색 파스텔톤의 색감과 각종 직물 패턴, 아늑한 조명, 어딘가 북유럽 스러운 이름을 가진 가구점들이 떠오른다. 그동안 한국에 있는 북유럽 디자인 Korean-nordic 스타일은 대충 봐왔으니, 스웨덴에 있는 진짜 스웨덴 디자인, 진짜 Nordic-nordic 디자인을 몸소 느끼고 감상하고 싶었다.



Mariefred 섬에 있던 예쁜 주방용품 가게. 눈이 팽팽 돌아가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소품이 가득했다.

인테리어 용품 및 잡화샵 디자인토르예 & 국내에도 알려진 아크네스튜디오, 그리고 현대미술관의 소품샵.


이케아 역시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스웨덴 대표 기업 중 하나다. 스톡홀름 외곽에도 큰 이케아가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광명 이케아가 스톡홀름 이케아보다 크다고 한다.(ㅋㅋ) 이 사실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과감히 스톡홀름 이케아를 포기하고 웁살라나 다녀왔을 것이다. 에라이.


사실 난 이미 스위스에서 있을 시절 베른에 있는 이케아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는 스스로 꾸밀 수 있는 진정한 '나 혼자의 방'이라는 게 있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던 거 같은데, 지금은 그냥 '부모님 집'에 얹혀살아서인지 이번엔 놀라울만큼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없었다. (ㅠㅠ)


4. 스웨덴 로컬과 대화 나눠보기 -> 성공! 그러나...ㅠㅠ


친구나 가족과 함께 가는 여행에서는 사실 '로컬을 만나서 대화한다'는 개념은 중요치 않다. 그저 예쁜 것들을 보고 눈에 담고 맛있는 걸 먹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게 되니까.


그러나 이번 스웨덴 여행은 철저히 '나 혼자' 계획하고 다니는 여행이었다. 또 무엇보다도 스웨덴의 예쁜 풍경보다도 이 나라의 실상에 끌려 방문하게 됐으니, 누군가 로컬을 만나 스웨덴의 면면곳곳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도 도착한 바로 다음날,  스톡홀름에 사는 로컬 스웨덴인 할아버지 Lennart 를 만나 내가 계획했던 목표가 너무 빨리 이루어져 버렸다. 너무도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에 정말 전문 가이드를 동행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얻어진 모든 행운에는 댓가가 있다고 했던가. Lennart 할아버지는 무언가 의뭉스럽고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이 우연한 만남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따로 다른 편에서 하고자 한다.





일상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에서는 목표 리스트를 설정했다 하더라도 다 이루기란 쉽지 않다. 때론 적절하지 않은 타이밍과 외부적 요인으로 이루지 못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때로 목표와 틀어진 선택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비행기 안에서 세운 버킷리스트는 다 이루지 못했지만 결국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 다른 선택을 하기도 했고, 이루지 못한 목표는 더욱 아쉬움을 남겨 다음을 기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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