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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MBTI이야기

MBTI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른 적이 있다.  티브이에서 보기론  MBTI를 처음 만든 이들 작가라고 했다. 작가라고 다 꾸민 이야기들만 쏟아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연스레 MBTI가 실험과 증명을 거친 과학적인 심리이론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유행이 시작된 지 한참 된 요즘도 여전히 MBTI를 묻는 것을 보면 인기가 금세 사그라들  같지는 않다.


연식이 드러나는 얘기라 꺼내기 부끄럽지만서도, 전엔 혈액형별 성격분류가 진리였다. 지금이야 혈액형별 성격유형을 들먹이면 20세기에 천동설을 믿는 사람을 보듯 세상 무지랭이로 보지만, 세기말엔 다들 만나자마자 혈액형을 물어댔다. A형은 무난하고 소심한 전형적 한국인. B형은 치명적 매력을 가진 바람둥이. O형은 솔직, 활달, 발랄형. AB형 천재 혹은 바보 혹은 둘 사이를 오가는 또라이. MBTI를 물으면 그런 거 안 해봤다고 라도 둘러댈 수 있지만 이건 뭐 혈액형을 모른다고 할 수도 없고, AB형인 나로서는 때론 O형 도 됐다가 A형도 되고 그랬더랬다.  O형의 비율이 제일 낮다던데 미팅만 나갔다 하면 다 O형 뿐인걸 보면 나만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나는 왜 너의 성격유형이 궁금할까?

꼬꼬마 사회인 시절, 부족한 내 응대에 화가 난 민원인이 두고 보라며 씩씩거리며 사무실을 나갈 때, 불안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진짜 민원을 내면 어쩐다? 과장님께는 경위를 뭐라고 말씀드리지? 답변서는 뭐라고 쓴담. 불안이 매초  복리로 불어나 손이 부들부들 떨리게 되었을 무렵, A4지 한 장에 빽빽이 적힌 민원지가 내게 전달됐다. 피크를 찍 불안은 급격히 낮아졌다. 대신 즉시 에너지보존법칙에 따라  불같은 분노로 치환되었지만 말이다.


불안은 상황이 어디로 튈지 모를 때 생겨났다. 매사 모든 결재에 화를 내고 태클을 거는 과장님의 호출은 불안하지 않다. 이건 그냥 절차일 뿐. 허나 간헐적, 불규칙적인 국장님의 호출은 큰일이다. 무슨 일일까 불안하다. 일이 와장창 벌어지면 오히려 차분해진다. 예측 불가능한 상대,  알 수 없는 반응 불안하고 불편했다.


혈액형이나 MBTI가 대략 맞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묻는 것은  예측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O형이라 솔직해서 그렇지 나쁜 맘으로 그런 얘기를 한건 아닐 거야. I이라 연락하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마음이 멀어진 것은 아닐 거야. ' 그렇게 과학도 뭣도 아닌 이론들로 예측불가능한 너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가늘디 가는 우리의 불안한 관계들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별자리점, 혈액형유형, MBTI 같이 기마다 새로운 성격유형을 점치는 이론들이 생겨나고 그 유행이 사그라들면서 또다른 성격유형에 의해 대체되는 것을 보면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인걸까. 어쩌면 남들도 서로 부대끼고 살아가려고 별 시덥지 않은 이론들을 떠드는, 가상한 노력을 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팽팽한 내 경계심이 느슨해진 느낌이 들었다.


역시, INFP라 그런지 타인의 정서를 이해하려는, 훌륭한 면이 있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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