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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영 Jan 15. 2023

존재에 대한 갈망, 그 허상과 진실

- 영화 '버닝'을 보고

영화 소개 및 간략 줄거리      


  '버닝'은 종수, 해미, 벤 이라는 세 인물이 각자 다른 형태로 우연히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주인공인 종수는 아르바이트 하는 마트에 물품을 배달하다가 어릴 때 친구 해미를 만나다. 해미는 종수를 바로 알아보지만 성형수술을 한 그녀의 얼굴을 종수는 알아보지 못한다. 둘은 함께 술을 마시고 섹스를 나누면서 가까워진다. 종수는 해미에게서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에게 종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일 뿐이다.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던 그녀가 벤이라는 부유한 청년과 함께 돌아온다. 직업도 분명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모든 게 풍요로운 벤은 종수에게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일 뿐이다. 벤과 점점 가까워지는 해미가 걱정되어 종수는 그녀에게 경고하지만 그녀는 종수의 말을 무시한다. 벤과 해미가 종수의 집에 놀러왔을 때 그녀가 잠든 사이 종수는 벤으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두어 달에 한 번 씩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이다. 그 때 이후로 종수는 해미와의 연락이 단절되고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의심스런 마음에 벤의 집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미행도 하면서 벤을 감시하던 종수는 벤의 집 화장실 서랍에서 해미의 시계를 발견한다. 벤이 그녀를 죽였다고 확신한 종수는 벤이 들려주었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방법 그대로 벤을 태워 죽인다. 

     


종수와 벤그리고 해미     


  영화 속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인공은 종수지만 모든 사건의 발단과 전개는 해미로부터 시작한다. 해미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 어릴 때 우물에 빠져 극한의 외로움과 공포를 경험했지만 가족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다. 사회적으로도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는 외로운 존재다. 경제 능력도 없어 그때그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겨우 유지하던 그녀가 꿈에 그리던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경비에 필요한 돈을 모아서 간 것인지 그마저도 빚을 내어 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 존재를 인정받고 사랑 받지 못했었기에 그녀 역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한다. 꿈을 꾸고 이상을 추구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그녀는 헛헛함 감정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녀로 하여금 꿈을 꾸고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마임과 여행이다. 마임을 하는 동안 그녀는 현실을 부정할 수 있다. 마임에서는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이라는 공간적 이동을 통해 현실을 탈피할 수 있다. 사는 공간에서 떠나 잠시라도 모든 것을 잊고 그녀가 추구하는 세상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추구하는 세상이란 어떤 것일까. 존재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태거나 뺄 필요가 없는 세상이다. 아프리카에서 그녀가 그레이트 헝거의 춤에 반한 이유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요구되는 것이 너무 많다. 경제 능력을 포함해 표준화 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가족에게서조차 외면 받는다. 종수네 집  앞마당에서 저녁노을 속에 나체로 춤을 추며 새가 된 듯 황홀해 하다가 울고 마는 해미의 모습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 해미 앞에 등장한 벤이라는 존재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욕구들을 실현해줄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하기에 충분하다. 해미는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불안한 청년들의 모습이다.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작가를 꿈꾸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평범한 이십 대 청년이다. 그에게는 세상이 수수께끼만 같아서 그는 소설을 쓰고 싶지만 정작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 종수는 꾸밈이 없으며 그래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해미가 떠난 방에서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신체로 그대로 흡수되듯 자연스레 자위행위를 한다. 큰 욕심이 없는 만큼 원망도 없다. 어릴 때 자식을 버리고 나가버린 어머니에게서도 반가움 외 다른 감정을 품지 않는다. 강직하면서 감정적인 아버지가 동네에서 벌인 폭력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그로 인해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보다는 해결해야 하는 사건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런 종수에게 현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해미의 존재는 특별했다. 그는 지금껏 바람이 부는 대로 순응하는 갈대처럼 살아왔다. 그에 반해 무성한 수풀 속에 가려진 자그마한 풀꽃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강렬한 햇빛을 갈망하는 해미가 어쩌면 신선했을지도 모른다. "귤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 보다 없다는 사실을 잊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마임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종수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이 우물과 고양이 '보일이'에 관한 이야기를 의심했지만 종수만은 그녀를 믿어준다. 무성한 수풀들 속에 거대하게 혼자 우뚝 서있는 나무처럼 마음껏 햇볕을 쬐는 것만 같아 보였던 벤에게 종수는 마음 속 얘기를 털어놓는다.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빠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으며 자신은 해미를 사랑한다고 절규하듯 말한다. 하지만 돌아온 건 벤의 차가운 비웃음뿐이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흐르듯 살아왔던 종수에게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커다란 나무 같은 존재가 작은 풀꽃들을 여지없이 짓밟는 것이었다. 순응하는 삶을 사는 그였지만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는 삶의 방식에는 가차 없이 뿌리까지 나무를 뽑아버린다. 그 나무를 뽑기 위해서 갈대 같은 종수는 자기 존재 전체를 걸어야 한다. 종수는 감독의 자아가 투영된 캐릭터로 보인다.     

  

  벤은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회 고위층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모습들 중 정점을 묘사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함 이라곤 없다. 젊은 나이에 고급 외제차를 타면서 강남에 있는 고급 주택에 산다. 가족과 친구들과 만나 정기적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책을 읽고 미술관을 다닌다. 모든 게 여유롭다. 부족함 없는 삶이 그로 하여금 권태감을 느끼게 했을지도 모른다. 삶에 권태감을 느낄 때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하나는 보다 가치 있는 새로운 일을 발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쾌락이다. 벤은 살인이 주는 쾌락으로 그 자리를 채운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비단 살인 행위만이 아니다. 살인 할 대상을 물색하는 과정, 그 대상이 합당한지를 한 번 더 점검하는 과정 그리고 대상을 제거하는 결말까지 모두가 그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쾌락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는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느낀다. 현실주의자이고 계급 특권 의식이 강한 그에게 하층 계급 사람은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 가진 게 없는 이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다. 그러한 벤의 심리를 대변하는 대사가 있다. "저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요. 음식은 나에게 바치는 재물이거든요. 만들어서 신에게 바치듯 먹어버리는 거죠." 벤에게 있어 살인이란 그가 재료를 구해 만들어 먹어 버리는 요리 과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반복되는 식욕처럼 살인이 주는 쾌락을 그는 끊을 수 없다. 그런 그에게 도덕적 판단은 필요하지 않다.

     


'버닝'이 의미하는 것들     


  '버닝'이 주는 의미는 각 캐릭터에게서 다르게 전해진다. 벤에게 있어 '버닝'이란 '쓸어 없앤다.'는 의미를 지닌다. 쓸모없고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가진 것 없고 죽어도 슬퍼해줄 사람조차 없는 이들이 그의 관점에서는 태워주길 기다리는 존재가 된다. 태우는 동안은 강렬하게 존재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태워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될 뿐, 쓸모없다는 판단은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은 신과 같은 존재이기에 자신만이 가려진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벤에게 '버닝'은 욕구를 해소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한 우월감을 확인하는 행위다.     


  종수에게 있어 '버닝‘은 처음에 해미에 대한 복수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넓게 보면 삶의 흐름, 자연의 흐름에 반하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그가 마음먹고 해 내야 하는 일, 할 수 밖에 없었던 사명 같은 일이다.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알아챈 후에 종수가 그 행위를 수행할 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버닝'을 하면서 비로소 종수는 수수께끼만 같았던 세상을 조금은 알게 된다. 아마 그는 이제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해미에게 '버닝'은 소망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는 어떤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빛나길 갈망하는 그녀였지만 타인의 의해 태워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타야 한다면 그녀는 스스로 빛나고 싶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해미는 다만 '바람같이 사라지길' 원했다.          


 

맺음말     


  영화 '버닝'을 보면 상실감, 쓸쓸함, 허전함 등 여러 감정이 올라온다. 그 중에서 주된 감정은 따뜻함이다. 그동안 이창동 감독이 만들었던 작품들에서(박하사탕, 초록물고기, 오아시스, 밀양 등) 감독이 보여주었던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따뜻한 시선이 ‘버닝’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전 작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통쾌함이 가미되었다는 점이다. 종수가 벤을 차와 함께 '버닝'해 버리는 장면은 그 행위만으로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관객은 야릇한 통쾌함을 느낀다. 이 점이 이전 작품들에서 주인공이 몰락하고(초록물고기), 후회하고(박하사탕), 소심하게 저항하던(오아시스) 것에 머물렀던 것과는 다르다. 벤이라는 인물이 사람으로서의 감정이입이 조금도 없이 물화된 대상으로만 여겨졌기에 그랬던 것 같다. 더불어 현대인이 가진 욕구를 실현해 주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이는 작품이 있다. '이건 뭘까?' 하는 느낌과 함께 뭔가 이야기를 충분히 해야 할 것 같고, 그 과정이 있어야 작품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영화들이다. 나에게는 '버닝'이 그런 영화들 중 하나였다. 처음 보았을 때는 인물들이 내뱉는 의미심장한 말들을 이해하면서 흐름을 따라가기에 바빴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표현하기 쉽지 않은 깊은 여운이 남았다. 이후에 몇 번을 더 보면서 인물에 대한 이해, 장면에 대한 이해, 서사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할 수 있게 되었다. 



2023. 1. 15 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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