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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영 Jan 24. 2023

욕망이 불러온 파멸의 서막

- 『안나 카레니나』(1~4편)을 읽고

## 안나와 브론스키, 그리고 까레닌     


  소설의 주인공인 안나는 러시아 사회에서 최상류에 속하는 집안의 안주인이다. 스무 살 나이 차이 나는 까레닌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그녀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결혼했을 뿐 브론스키를 만나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감정을 몰랐다. 겉으로는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보였던 결혼생활 8년 동안, 그녀는 자기 내면의 에너지를 온전히 아들에게 쏟아낸다.(p357 그녀만의 독자적인 영토, 그 왕국은 바로 아들이었다) 하지만 브론스키를 만난 후에 그녀는 건강한 신체가 뿜어내는 젊은 매력에 완전히 감화된다. 둘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급기야 안나가 브론스키의 딸을 출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브론스키를 사랑하면서부터 그녀는 점점 자기 삶에서 주체성을 상실해간다. 나중에는 어떠한 결정도 스스로 할 수 없는 혼란한 상태에 빠진다.      


  안나의 남편인 까레닌은 자기 삶의 영역에까지 관료적인 틀을 만들어 그 안에서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러했기에 그로서는 처음 맞이하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p183) 묵인하고 회피하려고도 하고, 나중에는 이혼 제도를 이용해 안나에게 복수하려고도 한다.(p361 까레닌의 편지에 대한 안나의 독백, 억압받았던 삶에 대한 자각) 하지만 출산 중 생사의 위기에 놓인 안나를 보면서 그의 내면에 녹아 있던 영적 선함이 발현된다.(p505) 그는 안나를 용서하고 아내가 남의 아이를 가진 현실을 껴안으려 한다. 하지만 무엇이 서로에게 가장 좋은 방법인가에 있어 자신의 생각과 사회적 요구가 달라 그 사이에서 갈등한다.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이혼 여성은 사생아의 엄마일 뿐 법적인 재혼이 불가했다. 따라서 이혼이란 안나에게는 곧 파멸을 의미했다. 그는 안나가 파멸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게 이혼하라고 압박한다.(p513)     


  브론스키는 안나의 애인이다. 사랑이라는 자기감정에만 충실했던 브론스키는 안나가 그의 딸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까레닌이 보여준 모습을 통해 성숙한 인간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는다. 스스로 자신을 패배자로 인식하고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 해(p507-508)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마저 실패한다. 그가 자살을 시도한 이유와 내적 갈등 과정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브론스키가 안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남자로 이해한다.(p166부분과 연결―불륜의 사랑으로 유혹하기 위해 인생을 거는 사나이 역은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지 결코 웃음거리가 될 리 없었다)     


     

## 실존에 대한 갈구와 그릇된 욕망     


  이야기는 잠재된 안나의 ‘욕망’과 브론스키의 ‘미성숙함’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지금까지 삶의 대부분에서 브론스키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다. 자신감 충만하고 거리낄게 없었던 그였기에 유부녀인 안나와의 관계에서도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외적으로 드러났던 그러한 자신감은 어머니가 경제적 뒷받침을 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브론스키와 달리 안나는 용광로 같은 ‘욕망’을 억압하고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브론스키라는 강한 자극제를 만나면서 잠자고 있던 ‘욕망’을 서슴없이 방출한다. 무엇이 안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게 했을까? 그동안 그녀는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매력을 충분히 인정받고 살아 왔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아 온 무수한 칭송만으로는 부족했다. 바라보며 감탄하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한 그녀는 ‘실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자기 존재를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 대상 속으로 들어가 공존하기를 원했다. 그녀에게 남편의 존재란 그녀를 대상으로 바라보는 무수한 사람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실존’을 갈구했던 그녀가 감각적 쾌락의 영역을 통해 ‘욕망’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브론스키는 그녀 스스로도 몰랐었던 욕망을 일깨워 주고 채워 주었다. 그것은 브론스키가 출중한 외모와 젊음, 싱그러운 미소 등 감각을 통해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매력이 넘치는 이성이기에 가능했다. 결핍이 있는 안나의 내면을 브론스키가 먼저 알아채고 감싸준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역시 안나로부터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적 매력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안나가 브론스키로부터 그랬던 것처럼 브론스키 역시 안나로 인해 그가 가진 감각적 욕망의 최고점이 건드려졌다. 만약 안나가 결혼생활에서 존경과 복종만 요구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남편과 정서적인 교감이 형성되었더라면, 그녀가 그토록 실존을 갈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감각적 욕망으로 비틀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안나가 스스로 자기 ‘욕망’을 억압하고 살 때는 바람직한 사회구성원으로 용인 받고 심지어 칭송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욕망’을 분출하자 사회는 그것을 강력하게 억압한다.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무력해진 그녀는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간다. 불륜과 이혼, 재혼이라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그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회가 그녀를 조롱한다. 안나의 불행인 동시에 나약한 한 인간이 몰락해 가는 과정이다. 그에 반해 브론스키는 사회가 요구하는 부분과 자신의 욕망을 적절히 조합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안나 만큼 사회적으로 비난받지 않는다. 그것은 여자에게 극도로 불리했던 당시의 사회 체제 역시 한 몫 한다. 브론스키는 남성이었다.    


       

## 삶을 대하는 태도     


  안나와 브론스키가 실존을 추구하는 과정에는 공통적으로 ‘욕망’이 있었다. 하지만 둘의 행보는 달랐다. 안나는 자기 ‘욕망’을 발견하면서 ‘주체성’을 상실해 갔다. 그에 반해 브론스키는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던 기존의 삶의 방향에서 한 발짝 물러서면서 오히려 삶의 ‘주체성’을 회복해 갔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연적이었던 까레닌을 통해서였다.      


  까레닌은 ‘욕망’과는 다른 범주에서 ‘실존’을 추구해 갔다. 지금까지 그는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그 속에서 안주하여 살아왔다. 촘촘하게 짜인 시스템 안에서 사는 동안 그에게 혼동이나 불안 따위는 없었다. 언제나 모든 것이 정돈되고 안정되었으며 완벽했다. 하지만 그가 구축해 놓은 삶의 경계선이 분명한 만큼 안나 속에 잠재해 있는 ‘욕망’ 또한 커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아내의 외도라는 돌발 상황이 까레닌으로서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안나의 출산과정을 지켜보면서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출산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에게 아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눈앞에는 사경을 헤매는 한 여인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건재해왔던 일상의 견고한 틀이 까레닌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삶의 형태일 뿐이었다. 그에게 내재해 있는 영적 선함이 완강한 그의 삶의 방식으로 인해 가려져 있었다는 것을 그조차 몰랐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이 점이 까레닌과 자기 욕망에 충실했던 두 사람이 다른 지점이다. 고통 속에서도 다른 남자를 찾는 아내 앞에 기꺼이 브론스키를 데려다 주고, 그녀를 응징하려는 사회적 요구 앞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까렌닌이 삶을 대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 맺음말     


  거장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지닌 다양한 측면을 각 캐릭터와 그들이 펼쳐내는 서사를 통해 풀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5편까지 보면서 그 중에서 '욕망'을 중심으로 이 작품을 읽어냈다. 이성과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인 레빈 또한 중요한 인물인데,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 속에서 성숙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비중 있게 그려지지 않을까 하고 짐작해 본다.

(5~8편에서 계속)         





                         

2023.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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