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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닝커리어 Sep 10. 2024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폭력

고등학교 위클래스에서 4년, 현재는 위센터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 모든 사례는 각색하여 재구성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학교상담자로 만나게 되는, 자주 접한다고 해도 절대로 둔해질 수 없는 끔찍한 사안 중 맨 위 순위에 있는 사례는 바로 친족 성폭력입니다.    

  

재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린 새아버지가 아내의 딸을 성폭행하거나, 자신의 성기 사진을 여자 조카에게 보낸다거나, 친아빠가 딸의 중요 부위를 상습적으로 만진다든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잊을만하면 상담을 통해 등장하는 것입니다. 몇 차례 신고했고, 제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법적 처벌을 받고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이런 일들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 세 번, 그 이상도.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은 이런 일을 아이가 고심 끝에 엄마나 주위 어른들에게 얘기하면 ‘그러게 그때 네가 왜 거기 있었냐’ 라거나 ‘술 마시고 그럴 수 있지’, ‘그렇다고 네 삼촌(혹은 아빠나 새아빠)을 감옥에 보낼 수야 없잖니’라며 아이를 나무라거나 회유하는 상황입니다. 이 대목에서 아이들은 믿을만한 어른이 없는 세상을 또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절망하게 됩니다.      


이에 더해, 이런 일로 갈등이 발생하고 부부싸움으로 번지게 되어 아이가 화근의 장본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앞서 일어난 일보다 그 이후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2차, 3차 가해가 아이의 마음을 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사례를 만난 날은 마음이 심란해서 도무지 표정을 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과 회의감.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건지…. 이 극악무도한 인간들은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지 쌍욕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쌍판떼기에 퉤!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가정이라는 공간과 가족이라는 대상이 치명적이고 위협적인 공포로 작동되면, 아이의 몸과 마음은 얼어붙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됩니다. 내가 딛고 있는 이 발아래 지면이 흔들리고 있는데 어떻게 올바로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중심이 흔들리고 충격받을 수밖에 없지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발표한 2023년 통계자료(성폭력 상담을 실시한 557명에 근거)에 의하면 피해자와 가해자와의 관계는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예년과 유사하게 84.3%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어린이와 유아의 경우 각각 50.8%, 21.3%가 친족에 의한 피해로 상담하였으며, 친족 성폭력으로 상담한 61명 중 44명이 13세 이하의 유·아동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저는 가해자와 방조자의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소리치고 싶습니다.     


왜 아이들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하나요!!

아이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왜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게끔 자책하도록 만들었나요!!

할 수 있는 게 죽고 싶다는 생각이나 자해밖에 없는 데 그럼 뭐, 도대체 뭘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힘들게 버티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른 무엇을 기대하나요!!    

 

이러한 무지막지한 세태는 사람을 경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보다 어린아이라서, 여자라서, 만만한 형제라서, 편하게 보아온 이웃이라서,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타인과의 경계를 훌쩍 넘어 침범해 버린 것은 아닌가요. 자기의 욕구만 충족시키려는 잔혹한 이기심과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는 일말의 존중이라고는 없는 후안무치한 사람들... 이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반성하고 또 반성하기를 바랍니다. 정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주변 어른들도 제발 이러한 일들을 끔찍한 일로 인식하고 피해자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 닿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까치가 된 상담쌤 -     


피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 친족 성폭력은 아동학대 사건으로 접수가 됩니다.

저의 신고로 태희는 가족과 분리가 되었고, 사안이 처리되는 동안 저는 일시적으로 태희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태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혹시나 그들이 저에게 찾아와서 행패를 부릴까 마음이 조마조마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태희의 학교생활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생기도 잃어가고 학업도 손을 놓게 되었습니다. 친구 관계까지 틀어지면서 삶의 균형을 잃고 휘청이는 태희를 보며 저 또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 개인의 삶뿐 아니라 한 가정을 흔들어 놓고 파국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닌가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상담자의 윤리강령은 내담자의 안전과 복지를 최우선으로 두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는데 제가 뭔가 윤리적으로 대처를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차라리 지금보다 낫지 않았을까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신고에 대해 후회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일들의 여파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후 태희에게 몹쓸 짓을 한 가해자 가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차저차해서 그들과 통화를 하게 되었고, 이후 두어 차례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 그들을 만나기 전에 가족이라는 이름을 방패 삼아 이빨을 숨기며 웅크리고 있는 악마를 상상했습니다. 악랄하고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그 가해자. 그들을 만나게 되면 제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의를 어떻게 감출지 걱정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가족이었습니다. 학부모 상담을 하게 되면 만나게 되는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이없게도, 눈물을 흘리며 태희를 걱정하는 그들(적어도 제 눈에 위선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을 마주하며 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저들이 가해자임이 분명한데 왜 저러는지,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답하기도 어렵고 막막했습니다.   

   

그들은 분리된 아이와 자유롭게 연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의 근황을 알고 싶어 제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저는 그들과 공조하며 태희의 마음과 가족의 마음이 서로를 위하고 있다는 것을 중간에서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태희는 서서히 그들을 용서하기로 결심했고, 저는 내담자의 안녕을 바라는 일념으로 그들 사이에서 까치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유사 사례의 영해가 있습니다.

영해는 엄마에게 사과를 받고 싶어 합니다. 자신에게 이런 혹독한 짓을 한 사촌오빠와, 자신으로 인해서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던 엄마로부터.

사촌오빠는 감옥에 가서 편지로 사과를 보내왔지만, 전혀 와닿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과의 필요에 대해서 인식조차 못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신 사과했습니다.

어른들을 대표해서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담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유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안하다. 딸.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그때 혼자 내버려 둬서. 내 잘못이야.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겠지만,

엄마가 정말 미안해.”      


대체로 저는 상담자로서 그 순간의 감을 믿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 때는 주저하지 않고 표현을 하는 편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아이들은 울컥 눈물을 보이거나, 아니면 ‘이 쌤이 왜 이러나’는 표정으로 당황해합니다. 영해는 저의 사과를 듣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아래를 쳐다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도 제 마음 편해지자고, 혹은 조금이라도 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던 조급함이 발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과는 진심이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 상처를 돌보지 않았으며 방조했던 수많은 어른 중의 한 사람이니까요. 사과를 듣고 기분이 어떤지 물으니 “잘 모르겠어요”라고 하더군요. 아이들이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잘 모르겠는 상태에 머물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안전한 대상과 공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착잡한 영해의 표정이 잔상으로 오래 남아 있습니다.     


제게는 몇 가지 직업병이 있는 데 그중 하나가 의심병입니다. 예를 들어 내담자 A가 엄마와 단둘이 사는데 최근에 엄마의 남자친구가 집에 들어와 같이 살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덜컥 겁이 납니다. 또 다른 내담자 B는 할머니와 사는 데 할머니 남자친구가 집에 자주 들른다고 해요. 그러면 또 저의 불안이 부릉부릉 시동을 거는 거지요.     

 

마음속으로 얘기를 할까 말까 불안이 거센 파도처럼 몰려오면 기어이 얘기를 꺼내 조심하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조금은 놀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알겠다고 합니다. 애꿎은 사람들을 왜 저 혼자서 가늠하고 파렴치한으로 몰고 가게 되었을까요. 밀려오는 입안의 쓴맛을 어찌하지 못하고 삼키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마주칠 때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세태가 통탄스럽기만 합니다.     


친족 성폭력 생존자 김영서 작가의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에는 9년간 친부로부터 받았던 지옥 같은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삶을 괴물의 노예로 끌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치열하게 버텨내었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인물들을 도우며 살고 있습니다. 그녀가 토해낸 아픔으로 우리는 그들 삶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이들을 이해한다거나 공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이들이 더 크게 자신의 목소리와 고통을 드러내도록 우리는 격려하고 또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지금이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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