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위클래스에서 4년, 지금은 위센터에서 고객님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 모든 사례는 각색하여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청소년들이 가을시즌에 많이 하는 고민이 무엇인지 아세요?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가을철 9, 10월이 수학여행 시즌이랍니다. 어때요, 감이 오시나요?
정답은 바로, 수학여행 갈 때 누구와 짝꿍을 할지, 놀이공원에 가서는 누구와 무슨 놀이기구를 탈지 바로 그 고민이랍니다. 어떤 담임선생님은 사전에 설문조사를 한다고 합니다. 같이 앉고 싶은 친구 1순위, 2순위, 3순위를 적고 같은 방(주로 4인 1실)을 쓰고 싶은 친구도 체크하도록 해서 조사를 하는 거지요. 이 결과를 바탕으로 대충의 짝꿍 지도를 완성하는데 이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스마트한 Chatgpt에게도 이 문제는 난제일 듯합니다.
지인의 아들은 중학생인데 담임선생님이 이런 수학여행 짝꿍 갈등으로 가득 찬 단톡방을 두 번이나 나갔다가 들어오고 하셨대요. 참 웃픈 일이지요? 검색을 해보니 맘카페 엄마들도 우리 아이가 수학여행 짝꿍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담임선생님께 이 문제를 제기할지 말지 걱정하는 글들이 많더군요. 이 정도면 수학여행이 학교생활의 큰 파장을 몰고 오는 행사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나마 요즘은 숙박하지 않고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학교도 많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학여행 가서는 또 어떻게요. 나는 역방향 롤러코스트를 타고 싶은데 친구들은 다른 걸 원하고, 줄이 너무 길어 한 시간이나 기다리기 싫은데 친구들 따라 같이 기다려야 하고, 시간약속 관련 등 불평불만의 속사정들을 한 아름 안고 지내다가 돌아옵니다. 집에서는 귀한 자식으로 대접받고 살다가 집 밖에서는 누군가를 참고 배려해야 하는 상황이 못 견디게 불편한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친구’ 문제는 아이들의 슬기로운 학교생활에 9할을 점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 맞는 한 명의 친구만 있어도 그런대로 견딜 만하지요. 그 한 명이 없어서 교실에서 독도처럼 뚝 떨어져 목석처럼 앉아있거나 급식도 먹지 않습니다. 덩그러니 혼자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고,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의식이 되어 차라리 굶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다른 활동도 일절 참여하지 않다 보니 흥미도 없고, 자신이 못나고 별로라 남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거라고 자기혐오만 늘어가게 됩니다.
보영이는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한 다음 날 위클래스로 찾아왔습니다. 상담을 신청하겠다며 저를 유심히 쳐다보는 태도가 아마도 상담쌤이 어떤 사람인지 한번 간(?)을 보러 온 것 같았지요. 맹랑한 태도에 요것 봐라? 하면서 만나보았더니 이미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위클래스의 장기고객이었고, 동반자 상담(청소년상담복지센터 소속의 상담자가 학교나 집으로 방문하여 청소년과 약 10∼12회기 정도 상담을 하는 케이스)을 오래 해온 경력직 내담자(?)였습니다.
문제는 보영이가 친구 관계에 서툴다 보니 처음에 호감이 있어 가깝게 지내다가도 며칠 못 가 다시 혼자가 되어 종국에는 가만히 앉아 친구들만 쳐다보다가 상담실에 와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늘어놓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소통이 단절되어 거의 방임되다시피 자라다 보니 관계의 상호작용 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적고 눈치를 익힐 요령도 배우지 못했지요. 친구에게 배려도 할 줄 알아야 관계가 유지되는데 줄곧 자기 마음대로 하려니 좋아할 친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를 만나면 ‘그때 네 마음은 어땠어?’ 물어볼 새도 없이 드라마나 교과선생님 이야기, 친구들이 어떻고 저떻고 잡다한 얘기들을 줄줄 늘어놓는 데에 급급하여 자기 정서를 살피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정에 머물러서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그때 내가 참 억울했구나.’를 이해하고 자신을 살피게 되는데 그동안 아무도 보영이의 기분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이제는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살피는 것이 어렵고 두려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회피하고 방어하는 것이 더 익숙하니까요.
덩치 큰 유치원 아이 같았습니다. 좀 진지하게 얘기 나눠보자고 해도 건성건성 ‘네네’하고는 또다시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내게 됩니다. 가끔씩 곤란한 부탁(일주일에 몇 번씩 상담 신청하기, 점심시간이나 수업시간에 자신만 위클래스에 있도록 해달라, 급식을 같이 먹어달라 등)을 해오기도 해서 가능할 때는 몇 번 수락하기도 하고, 여러 번 구조화를 하거나 당부를 해도 소통이 먹통이었습니다. 이후에 부모님을 설득해서 종합심리검사를 받게 했는데 경계선지능으로 나왔더군요(경계선 지능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전해드릴까 합니다). 여하튼, 보영이가 사회적 상황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고, 그런 일들이 반복하게 되면 비난받고 수용받는 경험이 없다 보니 사람들과 있을 때는 가만히 관찰만 하다가 상담자 앞에서는 자기 말만 와르르 쏟아내는 모습으로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었습니다.
친구 사이에서는 그냥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고 사소한 것이라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생각을 나누고 친해지게 되는데 그럴 대상이 전혀 없다 보니 상담쌤을 찾아다니고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을 찾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안쓰럽기도 하고, 호의도 모른 채 매번 되풀이되는 모습을 보면 답답하고 짜증도 났습니다. 친구 한 명만 있었더라도 보영이가 저렇게 외톨이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요즘 청소년들을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라고 하더군요. 일명 디지털 원어민이라고 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문화로 가득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지요. 이들이 제일 못 견디는 상황은 아마도 휴대폰 압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눈여겨보았던 몇몇 아이들이 있는데요, 이들은 교실에서는 소외되거나 소극적으로 지내면서 디지털 세상에서는 적극적으로 친구를 만들고 소통하며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습니다. 서로 얼굴을 모르는 익명성으로 인해 더 쉽게 소통하고 속마음이나 비밀을 털어놓게 됩니다. 상대방은 나를 모르기 때문에 어색한 점도 덜하고 편하게 느껴지게 되어 자유롭게 표현하고 그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지요. 그 세상에서는 친구의 고민에 위로와 응원을 해주고 나도 한 사람으로 가치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매일 같이 SNS로 소통하고 VJ 방송을 하면서 그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만일 자라오면서 아이가 이전에 외톨이나 따돌림 경험이 있다면 이후에 만나게 되는 친구 무리에서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고 그저 따라가고 맞춰주고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소속되기를 원하니까요. 나만 배제된다는 것은 너무나 치욕스럽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나의 욕구는 숨겨두고 친구들이 하자는 대로 하고, 그래야만 그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만의 사회적 기술을 습득하게 됩니다. 용돈을 풀어 환심을 하고, 다른 희생을 무릎 쓰고라도 친구가 기분 좋으면 나도 좋다는 식의 호구가 되는 방식으로 친구 만들기에 올인합니다. 그러다 무리에서 내가 소외된다면 내가 속했던 무리의 만행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다른 친구와 유대를 맺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도 우리는 연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이 둘도 갈등이 발생하며 원래의 무리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서로를 비난하고 모함하며 갈등의 국면은 더욱 복잡하게 됩니다.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자신과 다른 성향의 친구가 강하게 이끌면 자신도 모르게 쉽게 말리기도(?) 합니다. 소심한 자신과 달리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이것저것 과감하게 내지르는 성격을 접하면서 부러움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식이지요. 이 쎈 친구가 하자는 대로 다니다 보면 돈도 이전보다 더 쓰게 되고 이상한 논리에 지배받게 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소심한 A가 쎈 B의 흰색 패딩에 실수로 커피를 쏟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B는 어쩔 거냐면서 50만 원으로 퉁 쳐줄 테니 물어내라고, 안 그러면 내 물건을 망가뜨리고 배상하지 않았으니 학교폭력으로 신고할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습니다. A는 뭔가 찜찜하지만 B가 자신을 챙겨주듯이 이야기하고 학교폭력에 연루되면 부모님도 다 알게 되고 걱정하실 게 분명하니 스스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결국 한꺼번에 갚기 어려우니 매주 5만 원씩 주겠다는 차용증을 쓰게 되는 식으로 거래하지요. 제때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다시 협박이 이어지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논리에 아이들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갈취나 억지 심부름을 강요당하면서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속해있기를 선택하는 사례를 여러 번 접했습니다. 쉽게 정을 주고받으며 친구들이 나를 떠나가는 것은 너무 힘들고, 버려지고 내쳐지기 싫으니 이런 올가미에 옴짝달싹 못하게 갇혀버리는 것 같습니다.
무리 지어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보면 이들은 서로를 내 인생 최고의 인연을 만난 것처럼 신뢰합니다. 이 친구들이 있어 내가 존재한다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합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아 보이지만 얼마 안 있어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 실은 내가 많이 참아왔다,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 몰랐다, 다시는 얼굴 보고 싶지 않다며 급격히 빨리 손절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친구들과 엮이게 되고 친하게 되고 손절하게 되고... 저는 이런 사례들을 여러 차례 만나 상담하면서 과연 아이들에게 친구는 무엇이고 도대체 이번 관계는 또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염려되는 눈빛으로 지켜보고는 했습니다.
아이들은 친밀한 대상을 원합니다.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이외의 친구와 속마음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나의 은밀한 비밀이나 남들은 모르는 우리 집 속사정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비밀을 공유하게 되는 순간 남다른 사이가 된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관계 또한 비밀누설이나 뒤통수를 치는 여러 상황으로 인해 깨어지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서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며 대면 비대면으로 고성이 오고 갑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정은 결국 추락하게 되지요. ‘친구’가 있어서 울고 웃고 ‘친구’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합니다.
저는 중2 때 대구에서 부산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익숙한 터전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당시 친구들의 몫이 컸지요. 제게는 형제가 없기도 했고,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친구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편지를 쓰고, 생일선물을 주고받고, 제게는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암울했던 청소년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자 전부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어느 날은 엄마가 중요한 분(형편이 넉넉지 않은 우리 집에 매달 약간의 경제적 지원을 주었던 기업인)과 만나는 날이라고 늦지 않게 약속 장소에 오라고 했는데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가느라 약속에 불참한 적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그날 밤 ‘친구’밖에 모르냐며 호통을 치며 화를 내셨지요. 저는 친구를 위로하고 친구 얼굴을 보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엄마의 속상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제가 잘난 줄 알고 몇몇 친구에게 절교를 선언한 적도 있고, 상처받은 적도 있습니다. 20대 중반에서야 제 잘못을 깨닫고 연락이 닿는 친구에게는 전화해서 지난날의 오만을 사과한 적도 있습니다.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미처 사과하지 못한 친구도 있습니다. 제가 만나는 아이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미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또 확인하게 되네요.
만일 지금, 우리에게 마음 맞는 동료가 없다면, 가끔 생각나서 통화하고 차 한잔할 친구가 없다면 어떨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는 이 마음을 누구와 나눌지 저는 참 외로울 것 같습니다. 혼자임을 즐기는 것과는 완전 다르지요. 가능하다면 기꺼이 밥 한 그릇 대접할 친구가, 속상할 때 내뱉는 뒷담화를 맞장구치며 들어줄 친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아무 말하지 않아도 편안한 그런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