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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르 왕자 Oct 06. 2024

과거에 머물러 있는 교회

비판하지 못하는 사제들과 소셜 클럽이 된 교회 

한국 가톨릭 교회의 전통은 다른 나라와 달리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닌 서양학문에 대한 자발적 공부에서 비롯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중국을 통해 전해진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남인 실학자들이 공부하였고 혈연관계로 얽힌 권철신, 정약종, 정약전 등은 가족들이 모두 신앙공동체에 속할 정도로 깊이 믿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지기까지 자발적으로 북경에 가서  그라몽 신부에게서 필요한 교리를 배운 후 귀국하여 조선사회에 최초로 세례를 준 이승훈과 이를 도와준 이벽과 같은 인물들이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에  계급적 구분으로 유지되던 유교사회의 경직성은 상공업과 시장경제의 발달로 인한 중인계급의 부상으로 인해 시작된 사회적 역동성과 이미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고 전란 이후 농업, 상업, 소상공업등에서 여성들이 활동하면서 이들 역시 차별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된 터에 박애적인 공동체를 성립시킨 예수의 복음은 평등한 사회를 꿈꾸던 이들에게는 매우 심각하게 다가왔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출세나 관직에 집착하며 자신의 안위만을 돌보던 이들과 달리 일부 깨어있던 지식인 계층-소위 실학파-는 사회에 대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승화시켜 종교적 해법을 통해 새로운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실천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이러한 실천적 움직임의 결실이 바로 조선에 가톨릭 공동체를 건설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도 이어져 김수환 추기경을 필두로 한 가톨릭 교회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젊은이들과 노동자, 농민들을 보호해 주며 ''만인이 교회 앞에 평등하며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은 보호받는다"라고 하는 교회헌장을 직접 실천하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중남미의 어지럽고 혼란한 사회 속에서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된 '해방신학'의 모토 역시 "억압받고 차별받는 민중들을 위한 교회로 거듭나기"였음을 볼 때 예수의 말씀에 내재되어 있는 초기 가톨릭 교회의 '공의'는 차별받고 억압받으며, 고통받는 이들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늙어버린 교회는 소셜클럽과 같은 곳이 되어버려 주일마다 모여드는 노인들을 두고 부부갈등을 어떻게 푸는지 이야기하는 나이 든 사제의 토크쇼가 펼쳐지는 모습이 되어 있다. 그렇다 교회는 이미 고령화사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곳이 되고 말았다. 아니 단지 고령화 사회의 결과로만 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젊은이들이 없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20대와 30대가 천만이나 있다. 이들 중에는 분명 어린 시절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신앙을 견지한 이들이 있을 터인데 왜 주일에 그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  200년 전에 수백 명이 참수형을 당하면서까지 끈질기게 이어온 신앙공동체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며 40년 전에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항거하던 교회의 사제들이 만든 전통은 어디로 간 것일까?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시대적인 비판정신을 견지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정치와 신앙의 분리라는 공의에 집착하여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교리에만 집착하는 보수적인 태도가 교회의 축소를 불러오는 중요한 원인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들도 나머지 6일은 자신의 일터에서 살아나가면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관습과 법규에 구속되는 존재들이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많은 사회적 시스템과 이러한 시스템의 결과물들인 대학입시, 수도권 집중, 높은 집값과 고물가, 환경오염과 같은 문제들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반드시 의견을 내놓아야 마땅하다. 만에 하나 가톨릭 교회가 정치와 신앙의 분리란 공의의 근거를 초대교회에서 찾으면서 예수가 세속적인 문제와 거리를 두고 하느님, 신앙, 천국을 언급했을 뿐 유다지방을 지배하는 로마인들에 대한 저항운동과 같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면 이는 당시 예수가 비판한 핵심적인 세력인 바리사이, 사두가이파가 대대적으로 사제직을 세습해 온 세력들이며 정신적 문화적 지배력을 가진 계층으로서 로마법보다 우선한 관습법의 집행자로서 정치적 지배력 또한 갖추었던 이들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실현가능성이 낮은 로마인에 대한 봉기가 아니라 하느님과 너무나도 멀어진 그들의 세속화된 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종교적 지향점을 세우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결국 기독교가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아 로마 가톨릭이 된 역사를 비추어 볼 때 올바른 판단이었으며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에  민족, 계급, 영토와 같은 문제들을 초월하여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린 '개인'에 주목하면서 '개인'이 하느님 창조사업의 주인공임을 인식시키고  '개인'이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는 고통을 통해 신앙적 완성에 도달하는 여정을 보여 줌으로써 한낱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중요한 종교적 사역을 행하고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즉 예수는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유다국에서 바로 그 종교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하였으며 공개적으로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하고자 새리, 어부, 창녀들을 공동체에 기꺼이 받아주면서 하느님 앞에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실천적인 인물이었다.  


몸과 마음이 쇠약한 노인들의 편안한 안식처로서 교회가 안온함과 겉으로 드러나는 질서에만 집착하는 동안  사제들은 우리의 공동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이야기하지 못하는 교회에 취업한 '직장인'들로 변했다.  그러므로 지금 오늘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 교회가 내세우고 있는 사목활동의 목표는 과연 무엇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으며 교회의 효용을 편안한 일상에만 가두어놓고 우리를 둘러싼 모순과 잘못된 사고에 대한 경종을 울리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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