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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돌스토리 Jul 11. 2023

외국에서 영어가 필요한 순간

하와이 story.4 - 아들의 역할

10년 전 우리의 하와이에는 통역을 해주는 주문이 있었다.
‘아들~’로 시작하는 문장은 영어로 번역되었다.






 해외여행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언어'이다. 특히 스마트폰만 이용하면 모든 외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예전에는 영어조차 접하기 쉽지 않았던 시대의 어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 분들이 해외에서 소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그중 외국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대표 통역사가 되어 주거나.

2. 한국어로 외국인과 대화하는 기적을 행한다. (물론 외국인은 외국어를 사용한다.)


우리의 하와이 여행에는 영어에 능하신 분이 거의 없었고, 마침 나는 영어로 일상 소통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위의 1번 방법에 따라 수십 명의 통역사가 되었다.






5초에 한 번씩 울려 퍼지는 '아들~'

- 인간 비서, 인간 번역기 그 사이 어딘가


 이전 편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우리의 식사는 대부분 한식당에서 이루어졌다. 한글 메뉴판이 없는 한식당은 어딘가 이상하다. 한글로 적혀있지 않더라도 우리의 어머니아버지들은 사진만 보고도 척척 주문을 성공한다.


관광지에서도 특별한 영어는 필요 없다. 그저 말없이 카메라를 내밀고 손가락을 까딱하는 시늉을 하면 알아서 사진을 찍어준다. 하와이까지 날아왔건만 좀처럼 영어를 말할 일이 없었다.


출국 전날, 마지막 일정으로 우리는 아웃렛을 찾았다. 학창 시절 질문이 없던 사람도 쇼핑할 때는 질문이 많아진다. 사이즈, 색깔, 디자인 등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한 궁금증이 마구 생겨난다.


아쉽게도 질문을 받는 사람은 하와이에서 일하는 외국인이다. 디테일한 묘사가 필요한 쇼핑에서는 한국어와 영어가 소통되는 기막힌 기적을 보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수많은 한국인 엄마들에게는 통역사가 필요했다.



제법 저렴한 물건이 많았던 아울렛



과장이 아니라 5초에 한 번씩은 '아들~'이라는 소리를 가게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호출에 응해 달려가 궁금증을 해결해드리고 나면 어김없이 5초 이내에 다른 호출이 나를 찾았다.


테이블 위 작은 띵똥 벨에 뛰어다니는 맛집 아르바이트생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나는 AI 비서였다. '하이 빅스비', '시리야', 'OK Google'이라는 약속된 호출어 뒤의 명령에 응답해 주는 AI 비서처럼, 나는 '아들~'뒤에 따라오는 한국어를 영어로 뱉어내곤 했다.


졸지에 수많은 엄마가 생겨버린 결과 정작 진짜 나의 엄마는 아들 통역기를 활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엄마에게 언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약간의 영어와 바디랭귀지라는 훌륭한 언어로 무장한 우리 엄마는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내며 스스로 아웃렛에서 득템을 이어나갔다.



우리 엄마는 한국어로도 전세계인과 대화할 수 있다.






해외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다.

- 자식걱정 부모걱정


 한 번은 엄마와 밤 산책을 나간 적이 있다.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갖는 둘 만의 시간이었다. 야자수가 길게 늘어서 있는 해변가의 밤은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급급했던 오후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와이키키 해변 앞 하로수길을 (하와이+가로수길?!) 산책하며 휴양지를 즐기는 사람들의 밤을 구경했다.


유명한 호놀룰루 쿠키를 맛보며 길을 걷던 중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상황은 위급했고 우리는 주변에서 가장 큰 가게를 찾아 나섰다. 케이크를 판매하는 대형 펍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급한 불을 끄기로 했다. 케이크를 구경하고 있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엄마가 걱정돼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하와이 기념품 호놀룰루 쿠키 [출처 | honolulu cookie company]


하와이의 화장실은 비효율적으로 넓다. 오피스텔 원룸만 한 넓이의 공간에서 단 2~3명만 일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과하게 넓은 개인공간을 가진 화장실 구조에 대한 의문을 다 풀지 못하고 나왔을 때 엄마는 약속한 장소에 없었다. 큰일이다. 넓은 펍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문밖 광장에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와이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엄마를 찾기 위해 가게를 나왔다. 호텔로 먼저 들어가셨으려나, 어디서 구경하고 계시려나, 길을 잃으신 건 아닐까 걱정 속에 어떻게 엄마를 찾아야 하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는 지금처럼 로밍이 잘 되던 시기가 아니었기에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일단 찾으러 가보자 생각하고 달리려던 순간 저 멀리 화단에 앉아있는 작은 체구의 엄마가 보였다.* 그때의 혼잡도를 생각하면 어떻게 한 번에 찾을 수 있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가족 간의 끈끈한 무언가 혹은 사랑이 만들어낸 초능력이지 않았을까.

* 엄마는 케이크를 구경하던 중 구매하지 않는다면 가게 안에 있으면 안 된다는 점원의 말에 가게를 나왔다고 했다. 우리는 복수하는 마음으로 맥주와 케이크를 포장해 호텔에서 맛있게 먹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걱정하는 마음이 어느덧 반대 방향으로도 제법 커져있음을 느낀 짧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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