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리고 기울여야 합니다.
1.
내 앞에서 건물 계단을 내려가던 생면부지의 그녀는 나를 힐끔 뒤돌아봤다. 의심과 두려움의 눈이었다. 곧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더니 1층 출입문을 활짝 열어 건물을 빠져나갔다. 출입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건물 꼭대기 층까지 메아리쳤다. 메아리가 잠잠해지고 나서야 계단을 내려왔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그녀도 안심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억울했다. 나는 그저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이 싫어 계단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나는 대형마트에서도 사달이 있었다.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 북적이는 사람들과 카트들 때문에 나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시식코너 앞에서 다른 카트를 피해 가며 좁아진 통로를 천천히 빠져나가는데 젊은 여자가 뒤에서 부지불식간에 내 카트를 밀고 앞으로 빠져나갔다. 시식코너 테이블에 부딪힐 칠 뻔했다. 순간 욱해서 입에서 짜증을 냈다. 그렇게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한참을 가던 그녀가 갑자기 뒤돌아 나를 째랴봤다. 그리고는 경멸과 혐오로 가득한 눈을 한 채 내게 말했다. "나보고 뚱뚱하다고 욕했어요?" 주변 사람들은 나를 쳐다봤다. 지하철 성추행 가해자로 몰렸다가 2년 후 무죄를 받았다는 신문기사가 갑자기 생각났다. 나는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그녀의 눈은 나를 성희롱을 한 남자로 낙인찍고 있었다. 뒤에서 한참 떨어져 오던 와이프가 놀라서 나를 말렸다.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초라한 말들 뿐이었다.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저 글 쓰는 사람이에요." 집으로 돌아온 후 아내가 물었다. 왜 글 쓰는 사람이라고 말했냐고. 그래서 말했다. 불특정 다수가 둘러싸인 곳에서 여자가 성희롱 당했다고 주장하면 꼼짝없이 가해자로 몰릴까 봐 너무나 공포스러워서 그랬다고 말했다. 그런 공포 속에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고작 그 말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 이후로 그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아무 말 없이 멀찍이’ 돌아서 피해 다녔다.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두 계단 아래에 서서 일부러 딴 곳을 응시했다. 계단을 올라도 떨어져 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특정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샌가 마음속에 자리 잡혔고, 그 두려움이 미움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2.
행동주의 심리학 실험 중에 '어린 알버트실험(Little Albert Experiment)'라는 실험이 있다. 피실험자에게 어떤 공포를 반복 노출하면 특정공포가 조건형성 되는 것을 증명한 실험이었다. 태어난 지 1년 미만의 유아에게 '흰 쥐'를 보여주었다. 피실험자인 유아가 흰 쥐를 만지려고 할 때마다 큰 망치 소음을 내서 유아를 반복적으로 놀라게 했다. 실험 전에 흰 쥐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보였던 해당 유아는 그 후 흰 쥐 또는 흰 토끼를 봐도 울음을 터트렸다. 공포가 조건형성된 것이다. (이 실험은 향후 비윤리적이라고 비판받았다.) 또한 심리학에는 스키마(Schema)라는 용어가 있다. 스위스 인지발달 심리학자 '피아제(Piajet)'에 따르면 스키마는 개인은 경험과 학습에 의해서 구축된 개인의 인지구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어린아이가 부모와 함께 동물원에 가서 '말'을 처음 보았다. 아이는 말의 긴 목, 긴 다리 4개, 말꼬리, 울음소리 등을 통해 말을 인지했다. 그런데 아이가 '당나귀'를 보고 '말'이라고 하자 부모는 말이 아니라 당나귀라고 말해줬다. 그래서 아이는 말에 대한 기존 인지를 수정하고 말과 당나귀를 구분하게 되었다. 이것이 스키마다. 과거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개인의 인지와 지식이 설정, 수정 및 재확장된다는 의미이다. 앞서 설명한 두 가지를 조합해 본다면 인간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특정 대상(사람, 사물, 사건 등)을 개념화하고 판단하는데 특정 대상이 반복 노출되면 고정관념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즉, 새로운 정보가 유입되지 않는 한 기존의 스키마는 편견을 만들게 되어 의식적인 판단을 못하게 한다. 그래서 내가 간접 경험(뉴스, 기사, sns 등)과 직접 경험을 통해 해당 대상(사람 및 사건)에게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특정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이 순차적으로 발생했고 이내 그것은 편견 또는 고정관념이 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반대로 그녀들의 경우에도 이러한 메커니즘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건물 계단의 그녀가 매체와 주변을 통해서 남성에 의한 성폭행 또는 성추행 범죄가 특정 환경에서 발생한다고 자주 들었거나 실제 그런 유사한 경험을 했다면, 그녀의 행동은 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행동 또는 회피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마트의 그녀도 남성으로부터 외모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수 없이 반복적으로 경험했다면, 방어기제로써 내게 공격적으로 반응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들도 나를 보고 편견과 고정관념이 발동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역지사지가 되면 이해가 아니 될 수 없다.
3.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멀찍이’ 있다. 오해와 편견이란 덫에 잡히지 않을 유일한 나의 선택이자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양성평등원이 주장한 ‘잠재적 가해자와 시민적 의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불특정 다수의 여성에게 개별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들은 남성에게 주홍글씨를 새기고 원죄가 있다고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남녀갈등을 부추기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였다. 그보다는 그들이 현대 여성에 놓인 여러 다양한 문제와 위험으로부터 협력과 지지를 남성에게 구함과 동시에 공동의 이익을 공유하자고 제안하면서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라 '협력자'로 여겼다면 어땠을까 싶다. 만약 그랬다면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극단적 여성우월주의로 잘못 인식되는데 일조는 안 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소위 ‘이대남’과 ‘이대녀’들이 편을 가르고 으르렁 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참으로 먹먹하다. 서로 각자가 완벽하지 않고 조금씩 모자라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그걸 약점으로 들춰내서 싸운다. 서로 아끼고 보살피고 위해줘도 모자랄 판에 서로를 혐오하며 상대만 나쁘다고 하는 것이 나를 그렇게 침전하게 만든다. 사실 서로 기대며 채워주면서 한 팀이 되면 참으로 좋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재택근무, 주 4일제 등 서로 힘을 합쳐 정치와 사회에 요구하면 같이 함께 누릴 것이 많다. 그러려면 서로를 친애해야 한다. 오은 시인의 산문집 “다독임”에서 오은은 이렇게 말한다 “친밀함이 친애함으로 가닿기 위해서는 상대를 헤아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귀 담아들 어야 한다. 누군가를 친애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 친애하려면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과 귀 기울이는 행동이 우선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고 그 이면에 숨겨진 감정도 알게 되는 것이다. 헤아려주고 귀 기울여주자. 그것이 역지사지이다. 그래야 이 지리멸렬한 혐오를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도 두 손 잡고 걸어가는 아름다운 연인 한 쌍을 보며 흐뭇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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