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바가지'에서 '돈가스라이팅'까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땐 잘 몰랐는데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엄청난 유산의 상속자임을 알았다. 내가 받은 유산은 일종의 무형자산인데, 상속 절차는 따로 없었고 상속세도 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유산보다도 나에겐 큰 자산이다.
내가 받은 유산은 바로 언어 유산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사 남매가 집안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면 할머니가 우리를 이 “아이구...이 용천바가지들!”이라고 했는데, 어느 날 그게 우리 집에서만 쓰는 단어라는 걸 알고 할머니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용천바가지가 용천바가지지 무슨 뜻이긴 무슨 뜻이야?”라고 대답하셨다. 우리 할머니의 막연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면, 당신은 분명 우리 가족이다. 할머니가 용천바가지라는 말을 사용했던 수많은 상황들을 떠올리는 순간, 나의 의문이 바로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용천바가지와 상당히 유사한 말로 ‘개차반’도 있는데, 개차반은 용천바가지와는 달리 사전에 그 정의가 나와 있다. ‘개가 먹는 음식인 똥'이라는 뜻으로, 언행이 몹시 더럽거나 엉망인 사람, 물건 등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우리 집에서는 대상을 사람으로 한정하진 않았고 장난이 심했던 나의 남동생과 우리 집 화단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던 도둑고양이가 둘 다 해당이었으니, 역시 우리 집만의 용례가 있었던 셈이다.
엄마의 유산은 단어라기보다는 말하는 방식이었는데, 엄마는 매사에 단정적이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예를 들면 비가 오는 날에, “수제비 끓여 먹자”라고 말하지 않고 “수제비를 좀 끓이나 어쩌나.”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정육점에 가서 고기를 살 땐 한 근, 두 근 하는 식으로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고, “근 반 정도면 될지 모르겠네... 두 근 좀 못 되게 주세요.”라고 말했다. 딱 부러지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겐 짜증을 유발할 수도 있는 말투였지만 덕분에 엄마가 자식들에게도 한 번도 단정적으로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명령하는 말을 한 적이 없어서 오히려 좋은 점도 있었다. 내가 성적이 많이 떨어졌을 때 엄마는 야단을 치거나 다음번엔 잘 보라고 말하는 대신, “열심히 했는데도 안 된 거야? 어트게 조금 더 해 보면 어때?”라고 에둘러 다독이셨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집 언어유산의 9할은 아빠가 남겼다. 아빠는 평상시에 말하기를 즐겼고 같은 얘기라도 맛깔스럽게 했다. 아빠의 언어 유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욕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빈도수가 높았던 것이 바로 “예라이 이 똥물에 튀길 놈아!”였다. 아빠는 티브이를 보다가 뉴스에서 범죄자나 한심한 정치인들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저 눔 저거 똥물에 튀길 놈이라고. 나는 실제로 사람이 똥물에 튀겨지는 상상을 하며 혼자 낄낄거리면서도, 그게 우리 집에서만 쓰이는 독창적인 욕이라는 사실을 당시엔 잘 몰랐다. 내가 회사에 다니던 시절, 내가 늘 듣던 말이라 밖에서 이 말을 무심코 내뱉었을 때, 사람들의 엄청난 반응에 내가 더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빠가 침샘암 수술을 받고 입원중일 때였다. 오른쪽 귀에서 턱 밑까지 절개하고 종양을 제거한 큰 수술이라, 누구나 인정하는 미남이었던 아빠의 얼굴은 비대칭이 되면서 망가졌다. 수술 부위의 얼굴이 부어서 한쪽 눈은 뜰 수도 없었다. 수술 직후 아빠 얼굴을 보고 내가 기겁을 하고 눈물을 참고 있는데, 때마침 들어온 간호사에게 아빠가 이렇게 말했다. “간호사님, 나 지금 윙크하는 거 아닙니다. 오해 마세요.” 그 어떤 말보다 그런 고통의 순간에도 아빠가 농담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혼자되신 아빠는 43년을 살던 단독주택을 정리하고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이삿날이 정해지자 아빠는 아무래도 이 집과 곱게 이별하지 못할 것 같다며 심란해하셨다. 반평생을 산 집이고 엄마와의 추억이 곳곳에 배어 있으니 내가 이 집과 곱게 이별할 리가 있겠냐고. 계단에 살얼음이 어는 겨울철에 아빠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너무 위험해서 형제들이 의논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사실 우리도 걱정이 많았다. 평생을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만 살았던 아빠가 과연 아파트에 적응할 수 있을지. 이사 전날 언니와 함께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향하며, 아빠는 우리 집 대문에 대고 “네가 낡고 오래됐다고 내버리고 가는 거 아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서셨다. 그런데 막상 아빠 취향으로 수리하고 꾸며놓은 새 아파트로 들어간 순간부터 아빠는 의외로 새집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물었다. “아빠, 생각보다 너무 곱게 이별하셨는데요?” 그랬더니 아빠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르게 말이다. 내가 생각보다 의리가 없는 눔이드라고.”
한 번은 언니와 함께 아빠를 모시고 까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나오는데, 아빠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 이 눔 얼마 안 남은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물론 여기서 ‘너 이눔’은 아빠 자신이다. 그리고 아빠는 실제로 그 말을 하고 나서 몇 달 뒤에 돌아가셨다.
가장 슬프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스스로를 희화하고 웃음을 찾았던 아빠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우리 집 언어 유산 중에 내가 가장 눈독 들이는 자산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가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당신 방금 그 말, 장모님 말투하고 똑같았어!” 라든가 “엄마 지금 한 말, 할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 아니야?” 라고 말할 때면 내가 부모님의 언어유산을 제대로 물려받았음을 깨닫는다.
유독 언어에 좀 민감한 것도 내가 받은 유산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 가족은 영어의 p 와 f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b와 v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유달리 가혹하다. ‘안 되?’ ‘그랬데’처럼 맞춤법을 틀린 톡에도 유달리 경악한다. 정작 우리 자신은 언어 민감성과 반비례하는 처참한 방향감각과 숫자감각을 갖고 있어서 그 방면으로 빠릿빠릿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 천치 같은 짓을 수시로 하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언어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마음을 시원하게 언어로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드문 것 같다. 그래서 때로 나의 답답한 마음을 원초적으로 시원하게 긁어주는 나의 언어유산이 더 소중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어느덧 2년이 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오디오’가 그립다. 인생이 무슨 방송도 아닌데, ‘오디오’가 비는 것이 이렇게 쓸쓸할 일인가. 아빠의 오디오는 지금도 때때로 아빠 없이 재생되었다가 사라진다.
어느덧 나도 나의 부모처럼 나이 들어가고 아이들에게 과연 무엇을 남겨줄 것인지 생각해보는 나이가 되었다. 아마도 나는 이미 나의 아이들에게 언어 유산을 물려주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나의 아이들도 특별한 절차 없이 나와 남편에게서 그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다. 어쩌면 삶의 태도일 수도 있는 우리의 언어습관은 그렇게 나의 아이들에게 스며들 것이다.
작년에 가스라이팅에 관한 책을 번역하면서, 부모가 자식을 가스라이팅하는 경우가 가장 치명적인 사례에 해당된다는 내용을 읽고, 문득 내가 자식을 가스라이팅하는 부모는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딸에게, 혹시 엄마가 널 가스라이팅 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딸이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가 날 가스라이팅 한 적 있냐고? 아니. 엄만 그런 적 없어. 돈가스라이팅이라면 모를까.”
돌아가신 아빠 스타일의 유머를 나의 딸에게서 발견할 때 나는 속으로 울면서 웃는다. 그리고 안도한다. 나의 아빠의 언어 유산은 손녀딸에게 상속되는 중이다.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놀랍고 또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