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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바로가 Nov 20. 2024

박병윤시인의 “노랑별수선”

세월호 잊지마세요

  T.S. 엘리엇이 그의 시집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그 이유로 그는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라고 적는다. 그가 이렇게 추억과 욕망을 언급한 것은 1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전쟁의 상처와 아픔때문이었다.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욕망이 전쟁을 일으켰고 그로 인한 전쟁으로 많은 아픔을 그 이후로도 계속 겪어야 했다.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낙관은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다. 특히 대규모의 사상자를 내고 엄청난 파괴를 가져온 과학역시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가져온 재앙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4월 16일이 되면 우리는 슬픈 아픔에 사로잡힌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세월호 사고가 그것이다. 사고라기 하기에는 부족한 말이다. 세월호 참사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꽃다운 아이들이 어른들의 욕심과 이기심에 이유도 모른채 스러져갔다. 이제와 그것을 속속들이 우리가 알고 한탄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우리는 천민 자본주의의 민낯과 이기심의 끝을 보았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사건으로 남은 세월호 참사.

  시적 화자는 사월의 어느 봄날 노랑별 수선과 우리의 순수한 학생들을 겹쳐본다. 화자는 노랑별 수선의 한 떨기 별과 같이 떨리는 작은 꽃으로 그들을 묘사한다. 그 작은 꽃을 닮은 그들이 우리를 스쳐지나간 별똥별 같다고 말한다. 진도에 흩어진 노랑별 수선꽃처럼 그들은 우리로 인해 상처받은 어린 꽃으로 바람에 흔들린다. 작은 꽃들은 바람에 흩어질 새라 잎새와 줄기를 간신히 땅에 붙인 채로 바람에 몸을 싣는다. 우리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은 그렇게 그 야트막한 언덕에서 우리를 부른다. 욕망과 욕심이 찌든 우리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단지 진도 그 작은 섬에 핀 그들은 4월이 왜 잔인한 달인지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8년 후에 이태원에서도 꽃다운 아이들을 잃었다. 이번에도 누구도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반농담조로 “이젠 어른도 못 믿겠어요”라고 말하는 어린 학생들의 말이 매우 호되고 따끔하게 들린다. 우리는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노랑별 수선이 된 아이들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욕심과 욕망이라는 괴물과 항상 싸워야 하는 존재로도 버겁기 때문에 그들에게 제대로 된 용서를 절대로 빌 수 없을 것이다. “손이 발이 될 때까지” 우리가 그들에게 빌어도 우리는 죄인이다.

  그러나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안하는 어른은 되지 말아야 한다. 욕심과 욕망의 눈이 번뜩이는 곳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눈을 뜬 어른들이 욕심과 욕망에 괴물이 된 사람들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지만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우린 영원히 죄인의 굴레를 후대에 다시 물려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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