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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늘보 May 04. 2023

전지적 딸 시점 - 할머니의 며느리

사람들은 엄마를 요즘 시대 며느리라고 한다.

내가 태어난 직후, 아빠의 직장으로 우리는 급히 한국으로 귀국했다. 백일도 안된 나를 데리고 집을 알아볼 여력이 없었기에, 일단 친할머니 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아직도 말씀하신다. 그 일단이 3년이 될 줄은  몰랐다고. 당시 엄마는 스물다섯, 꽃 다운 나이에 시집살이를 하셨다. 



결혼 후 첫 방문이어서였을까. 엄마는 좋은 며느리인 척 연기했다. 시차적응 겸 모유수유 겸 새벽 일찍 일어나셨다. 그러고는 시부모님께 눈도장을 찍고 며칠 밥상 차리는 일을 도왔다고 했다. 그러다 시차가 적응되었고, 곧 엄마의 수면패턴이 드러났다. 그렇다. 그녀는 올빼미족이었던 것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엄마를 제외한 모든 친가 식구들은 초저녁에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새벽형 인간이다. 새벽 5시면 눈이 떠지는 신기한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물론 나는 엄마를 닮아 아침잠이 많았는데, 이게 엄마의 숨통이었던 것 같다.


매일 아침, 엄마는 시부모님께 이렇게 둘러댔다.

“애가 밤늦게까지 잠을 안 자서…”
“애가 새벽에 몇 번을 깼네요”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엄마는 비슷한 변명을 참 다양하게도 했다. 늦잠 자는 게 민망하셨나 보다. 그렇게 엄마는 밥상은커녕, 아빠 배웅도 못하는 날이 잦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내가 귀가 좀 트였을 시기, 할아버지의 불평이 종종 들렸다. 

“얘는 왜 맨날 늦잠이니? 밥도 안 차리고”

 

어떤 날은 고모가 놀러 와서는 엄마한테 말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도 차리고, 점수 좀 따봐!” 

엄마는 그냥 웃으셨다. 


그러고는 외할머니한테 가서 토로했다. 

“나는 참 형편없는 며느리 같아. 그런데 밤에 몇 번씩 깨는 아기 키우면서 아침 차리는 건 죽어도 못하겠어.” 


그러다 어느 날, 마음의 결정을 하셨던 것 같다. 본인은 그냥 철없는 며느리 컨셉으로 나가겠다고. 어리기도 했고, 철이 없기도 했으니, 사실이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는 설거지도 했고, 왕할머니가 오시면 점심밥상도 차려드렸고, 가족 행사도 꼬박꼬박 잘 참석했다. 시부모님 말에 토를 달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정성껏 키웠다. 그저 아침잠이 많을 뿐인데. 엄마는 늦잠 자는 자신이 며느리로서는 빵점이라고 생각했을까?  


몇 년 후, 우리는 분가를 했고 엄마는 나랑 동생을 키우며 일과 살림을 하셨다.

엄마의 몸이 가끔 버거워 보였지만, 마음만은 편안해 보였다. 


지난주 토요일, 우리는 KTX를 타고 광주에 다녀왔다. 아빠의 사촌동생 결혼식이 있었다. 우리 네 식구는 아침 9시에 나와 분주히 기차를 타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동생이 화동을 맡았기에, 엄마는 화동드레스까지 챙겨 가져갔다. 식이 끝나고 할머니 옆에 앉아 밥을 먹는데,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왜 며느리들 안 왔어?” 

우리 할머니가 물으셨고, 세 번째 이모할머니가 대답했다.

“몰라, 뭐 10월에 임용고사 시험이 있대.”

“아니, 지금이 4월인데?”

“그러니까. 며느리랑 아들한테 뭐라고 말도 못 하고…, 그냥 포기했어”

주변에 앉아 계신 어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잠을 자려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와 아빠의 대화였다.

“결혼식에 우리 며느리만 참석했네. 조카며느리들은 저번 명절에도 안 오더니만.”
“엄마! 우리는 가족행사 다 참석하고, 주말마다 밥도 먹으러 가네.” 
“최권사님 며느리는 ‘집에 올 거면 제 허락받고 오세요’라고 했다면서. 이 집 며느리는 엄마가 갑자기 들이닥쳐도 아무 말 안 하잖아. 싹싹하지 않을 뿐… 이 정도면 좋은 며느리 아냐?” 아빠가 덧붙여 말했다. 
“그러네.. 우리 며느리가 제일 낫네.”


엄마는 이 둘의 대화를 들었을까? 

나는 엄마가 좋은 며느리는 아니란 걸 안다.

그렇다고 나쁜 며느리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엄마가 착한 척 연기하지 않고, 지금처럼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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