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몇 번을 되뇌니 눈앞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병원장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우리 병원에서 일하게 된 것은 전임 병원장님께서 병원 홍보를 강화하기 위해서 저를 카우트 하면서부터입니다. 만약 홍보가 아닌 다른 부서의 업무를 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면 결코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둘 다 팀장인데, 누구는 팀장이고 누구는 사원이면 누가 봐도 제 인사는 좌천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요. 물론, 병원장님께서 어디든 발령을 내시면 마땅히 따라야 하는 일입니다. 다만, 제가 홍보팀장으로서 그동안 부족한 부분이 있거나 과오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냐. 홍보팀장이 일을 못하거나 문제가 있는 것은 전혀 아냐. 아까 말한 대로 다른 부서 경험도 해보고 환자경험평가도 중요한 평가니까 김영권 팀장하고 잘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 봐. 다른 뜻은 전혀 없어. 그리고 파트장 보직을 생각해 봤는데 티오가 없어서 말이야.” 병원장님의 말씀에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병원장실 안은 잠시 정적이 흘렀고, '더 이상 항변해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목례를 하고 병원장실 밖을 나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분노, 황당, 창피, 슬픔, 짜증...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진 걸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 문장을 계속해서 되뇌었지만 도무지 머릿속은 진공상태가 된 듯했다.
기가 막힌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도착하니 며칠 전 주문한 비데가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 앞에 쭈그려 앉아 비데 박스를 풀어헤치고 있으니 주방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녁식사 다 차렸는데 먹고 하세요.”
밥맛은 없었지만 아내가 혹시라도 알아차릴까 봐 식탁 앞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삼겹살과 김치찌개가 차려져 있었다.
차려진 밥상을 보고 나니 배에서는 눈치 없게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생각해 보니 오늘 먹은 거라고는 물밖에 없었다.
뜨거운 국물 한 모금을 떠먹었다.
고기 육즙과 김치가 조화롭게 끓여지면서 배어 나온 국물은 입 안을 휘감으며 매운맛과 신맛과 달콤한 맛을 모두 느끼는 혀의 감각 세포를 자극했다.
입맛은 정신을 지배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아내가 퍼준 밥 한 공기는 바닥 긁는 소리까지 내며 금세 다 비워졌다.
포만감을 느끼며 배를 쓰다듬는 내 모습에 ‘피식’하며 뭔지 모를 쓴웃음이 튀어나왔다.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비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설명서는 혼자서도 설치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안내돼 있었다.
먼저 변기 뚜껑을 뜯어냈다.
그다음 순서인 변기 하단부에 있는 급수 밸브를 잠그기 위해 허리를 굽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순간 허리가 뜨끔거리면서 아주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찌릿찌릿 나타나는 통증으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도중에 중단할 수도 없으니 아주 힘겹게 가까스로 비데 설치를 마무리했다.
잠시라도 허리를 펴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에 벽을 짚고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방바닥에 누웠다.
“휴~” 하고 경직됐던 허리가 펴지면서 안도의 큰 한숨이 나왔다.
긴장감이 풀리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명상음악을 들으며 눈을 좀 붙어야겠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찾으려 허리를 움직이자 다시 찝찝한 통증이 찾아왔다.
유튜브 오프라인 저장 동영상에 저장돼 있던 명상음악을 플레이했다.
이 음악은 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위로가 돼 주는 고마운 음악이다.
나도 모르게 들었던 잠에서 깨어 휴대폰을 보니 밤 9시 5분이었다.
두 시간 정도를 잤나 보다.
머리가 개운했다.
화장실을 가려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악!”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