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소 Feb 12. 2023

휴학을 취소했다.

죽을 사람은 자다가도 죽고, 살 사람은 뭘 해도 살아


"휴학 안 하면 안 될까..?"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뜬금없이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충격적인 한마디였다.




쉼 없이 달려온 입시생활에 이어 4학년을 앞두기 전 1년 동안 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려 했다. 적어도 올해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수강신청을 앞둔 며칠 전 아버지께 들은 말이었다.


때문에 3월에 가기로 약속했던 친구와의 유럽여행을 모두 취소하고, 방학 동안 인턴으로 번 돈을 모두 취소 수수료로 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친구에게도 너무 미안했고 모든 상황이 억울했다. 꿈꿔왔던 여행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휴학에 대한 간절함과 자신감이 있었다면 당장 향후 계획에 대해 당당하게 말하며 휴학을 밀어붙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그저 퇴직을 앞둔 아버지께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컸고, 휴학을 취소하는 방법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았고, 그저 나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기에 급급했다.


급하게 휴학취소를 신청하고 이리저리 꼬인 학교 홈페이지 내 정보를 보며 내 정신도 마음도 점점 꼬여갔다. 모든 게 급하게 이루어졌다. 급하게 여행을 취소하고, 급하게 수수료를 메우고, 급하게 졸업전시 팀원을 구했다. 급하게 한 것 치고는 어떻게 잘 흘러가긴 했다. 부모님 몰래 생활비 대출을 받아서 남은 수수료를 메우고, 동아리에서 같이 활동했던 언니들이 꾸린 팀에서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모래성을 쌓는 기분이 들었다. 겉으로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내면은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부실공사를 한 탓인지 마음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학업과 외주를 병행하며 체력도 심하게 망가졌다. 부정적인 마음을 해소하지 못한 채 나쁜 기운만 계속 쌓여갔다. (그 당시 나를 본 사람들은 어둠의 기운을 폴폴 풍기고 다니는 걸 느꼈을 것이다..)


100명 가까운 예비졸업생 중에 동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SNS를 켜면 쉬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코앞까지 갔던 내가 바라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분함을 잃고 나의 상황을 더욱 불행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건 모두 부모님 탓인 것 같았고, 그들이 미웠다.


가끔 하는 통화에서는 괜찮다, 잘 있다, 잘 되어간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속 울분의 출구를 올바르지 못한 곳에 둔 채 풀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든 결국 휴학취소 버튼을 누른 건 ‘나’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모든 우울과 불행의 탓을 돌리고 싶었다.


이때의 나는 불행과 우울에서 자신을 꺼내는 방법을 몰랐다.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도, 고민을 어딘가에 털어놓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부끄럽고 안쓰러운 과거다. 주변에서 불행의 씨앗을 뿌린 게 맞더라도 그 꽃을 피운 건 나 자신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졸업 전시를 무사히 마치고 운 좋게 큰 규모의 외주를 하게 되었다. 외주가 끝날 무렵 우연히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와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고, 끝날 때쯤엔 인턴을 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와 일을 하게 되었다.


운이 참 가득했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함께 외주를 한 팀원과는 사이가 틀어졌고, 아르바이트를 한 회사 대표와 직원은 혐오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었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그들은 더 이상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돈은 많이 모았으니 넘어가기로 한다.




휴학을 취소하며 만든 나의 새로운 목표는 "졸업 후 1년 간 쉬기"였다.

부제목은 <주변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총 모은 돈은 800만 원 남짓.

이 정도면 적당히 굶어도 여행은 다녀올 수 있겠다 싶어 3월까지만 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4월에 떠나는 헝가리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부모님은 '딸'을 '혼자' '유럽'여행을 '한 달 넘게' 보낸다는 사실에 결정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매년 "혼자 유럽 여행 떠날 것이다!"라며 주입식(?) 발언을 한 덕분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장담컨대 그들은 내 눈에 서린 광기를 보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느 날 방에 들어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엄마가 생각해 봤는데.. 죽을 사람은 가만히 숨 쉬다가도 죽고,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살더라. 난 뭘 해도 살아남았거든. 너는 내 딸이니까 별일 없을 거야."라며 나를 응원하는 듯한 단호한 어조였다. 아버지는 내가 한 번 마음먹으면 꺾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셨고, 엄마까지 합세하시니 조용히 끄덕이셨다.


작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하나 얘기하자면, 엄마는 그때 내가 어딘가에서 애인이라도 구해 함께 여행을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실 만큼 걱정이 많으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런 마음을 감추고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씀만 전해주셨다. (고마워요)




마침 독일에서 유학 중인 친한 친구가 있어 여행 마지막에 잠깐 만나기로 했다. 4월에 헝가리로 입국해 6월에 독일에서 출국하는 일정으로 비행기를 끊고, 차근차근 나머지 계획을 세워나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