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할까?
안녕하세요.
저는 ‘3D 그래픽 디자이너’입니다.
예고, 미대를 나와 주변에 온통 미술과 디자인을 하는 사람뿐인 나는, '3D 그래픽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바로 알아듣는 안락한 환경에서 자랐다.
최근에 HOC(High Output Club)라는 200명이 넘는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모여있는 커뮤니티에 들어가면서 나와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할 일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3D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소개했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다음과 비슷했다.
- 아~ 그럼 캐드 같은 프로그램 사용하시는 건가요?
- 아. 그건 설계도면 기반이라 건축이나 인테리어 하시는 분들이 많이 사용하시는 거로 알고 있어요.
- 오 그럼 사용하시는 프로그램 이름이 뭔가요?
- 시포디(Cinema4D)라는 3D프로그램인데 모션 그래픽이라는 영상 제작 하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프로그램이에요!
- 오~ 그럼 영상 제작하시는 건가요? (대부분 이쯤에서 대화가 어영부영 마무리되거나, 계속 궁금한 눈빛을 보내시면 냅다 포트폴리오를 보여드린다.)
- 음 네 영상 제작할 때도 있어요. 영화나 유튜브 같은 영상보다는 아이폰 광고같이 프로모션 영상을 만드는 걸 하다가, 요즘은 메타버스 그래픽 제작을 많이 하고 있어요. (초반에는 밑줄 부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으나 말만 길어지는 것 같아 생략했다.)
- 오….! 요즘 핫하다는 메타버스...!
- 음 제페토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좀 이해가 되실까요?
- 오오 네! 그 게임 같은..
- 음 네 비슷해요! 회사에서 VR게임도 제작하고 있긴 해요.
- 오~.. 게임을 제작하시는구나…
이렇게 나는 어느새 게임을 제작하는 디자이너가 되어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대체 그래서 뭘 하는 사람인지 궁금할 것 같다. 사실 부모님도 내가 뭘 하는지 잘 모르시는 것 같다.
최근에는 그나마 블랜더(Blender)라는 프로그램이 유명해져서, ‘블랜더랑 비슷한 프로그램이에요!’라고 설명했을 때 간혹 이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입니다. 라고 하기에는 비핸스(Behance)에 차고 넘치는 잘난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들에 비해 한참 뒤처져있고,
[3D 프랍 모델러]입니다. 라고 하기에는 전문 모델러로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지브러쉬(Zbrush), 마블러스(Marvelous) 프로그램을 다룰 줄 모르며,
[메타버스 배경 디자이너]입니다. 라고 하기에는 메타버스 관련 프로젝트를 중간중간에 1~2년 정도 했을 뿐이고 전문적인 환경 세팅은 여전히 튜토리얼을 보며 제작해야 하고,
[디자이너]입니다. 라고 하기에는 내가 생각할 때 디자인적인 논리가 한참 부족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타이포그래피를 잘하는 사람이 ‘디자인’을 정말 잘하는 ‘찐 디자이너’로 느껴진다. 본인은 해당 없음.)
올해로 5년 차가 되었지만, 나의 직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나 조차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일례로 가끔 채용 공고를 들여다보면, 내 포트폴리오가 과연 어떤 파트에 적합할지 찾기 어렵다.
5년째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매년 새로운 업무를 하게 되어 스페셜리스트보다는 애매한 제너럴리스트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션 그래픽 디자인‘으로 시작해서, 2D 보다는 3D에 더 비중이 높았고,
‘3D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입사했지만, VR 게임 제작을 위한 ‘프랍 모델러’가 될 때도 있었고, WebGL 메타버스 환경디자인을 위해 유니티를 공부하며 ‘Unity 배경 디자이너’가 될 때도 있었다.
뭐 어쨌든 모두 3D+디자인 베이스이니 어디 가면 ‘3D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곤 하는데, <디자이너>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감이 나에게는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디자이너'란,
1. 새로운 아이디어로 문제를 독창적으로 해결하고
2. 색상, 폰트, 형태, 레이아웃 등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으며
3.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뒷받침할 논리와 근거를 갖고 있고
4. 왠지 피그마(Figma)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5. 옷도 잘 입어야 할 것 같다.
돌이켜보면, 3D 그래픽을 하면서 디자이너보다는 영상 제작자이자 기술자에 가깝게 업무를 해왔다. 디자인 논리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이 장면을 어떤 식으로 구성할지 스토리보드, 스타일프레임 등을 제작한 뒤 Cinema4D로 구현하며 프리뷰를 보며 확인한 뒤.. (중략).. 오디오 편집과 후반 작업을 해가며 영상을 제작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하게 설명해야겠다.)
그때그때 필요한 업무 스킬은 유튜브나 구글에 검색해서 튜토리얼을 보거나, 옆자리에 계신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식으로 업무를 해왔다.
3D 그래픽 디자이너의 인사이트를 찾아보기란, 마른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브런치만 봐도 태그에 '3D'를 검색하면 3DMAX, 3D게임, 3D펜, 3D프린트 순으로 나온다.
3D 그래픽 디자이너 혹은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 선배들이 하는 고민이나 생각들을 찾아보고 싶지만, 굉장히 어렵다. 검색하면 모두 '튜토리얼'에 대한 이야기만 나와있다. (혹시 인사이트와 관련된 도서나 글을 발견한 분이 계시다면 댓글로 링크를 남겨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보면 튜토리얼에 나와 있는 과정들도 모두 인사이트겠지만, 그들이 평소에 직업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라든가 앞으로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듣고 싶고 알고 싶다.
나도 내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 기술자로서 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더 잘 사용하고 좋아 보이는 영상을 만드는 가에 대해, 프로그램을 익히고 레퍼런스와 비슷하게 때깔이 좋아 보이는 영상을 뽑는 것에 중점을 둬왔지, 내가 왜 이걸 이런 프로세스로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감각으로 해왔던 것 같다.
누군가 나에게 내 직업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한다면, 나도 냅다 튜토리얼을 적을 것 같다.
트렌드에 민감한 직업군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비핸스(Behance)라는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업로드하는 웹사이트를 보다 보면 매년, 매달, 디자인 트렌드가 바뀌고 점점 잘하는 사람들이 대거 생겨난다. 본교 졸업 전시만 가봐도 지금의 나보다 훨씬 잘하는 친구들이 많이 보인다.
조금만 놓치면 도태되는 이 물결에서, 업무를 왔다리 갔다리 해 온 나는 '나의 전문성'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더욱더 내 직업에 대해서, 디자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내가 <디자이너>와 <영상 제작자> 사이에서, <디자이너>로서 좀 더 능력치를 높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감각으로 하는 것은 나보다 어린 사람보다 잘할 자신이 없고, 비슷한 지점에서 한계를 느낀다. 3D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나의 전문성을 높이려면 기술도 중요하지만, 전반적으로 더욱 전문적이고 논리와 근거가 있는 아웃풋을 뽑아내고 싶다.
최근까지도 디자인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중에 떠나더라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공부하고 남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