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心尋), 마음을 찾는 시간 1화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만 대보라고 한다면 나는 책상을 쾅, 내리치며 말할 것이다. "열 개는 안 되나요?"
걷고 있노라면 머리를 쪼갤 것만 같은 더위, 제멋대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 가벼운 옷차림으로 인한 다이어트 압박. 게다가 타고나길 열 많은 내 체질 탓도 있겠지만 여름엔 무언가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몸이 자체 쿨링 시스템 작동에 집중하느라 뇌에 전달해야 할 에너지가 딸린다고나 할까. 어디 그뿐인가. 장마라도 시작되면 몸과 마음이 모두 꿉꿉하고 끈적거리는 기분이 들어 짜증의 빈도도 높아진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난, 여름이 질색이다.
···이런 생각을 야자수가 펼쳐진 공원의 구석에 앉아서 했다. 하필 골라도 어째서 파나마였는지. 일 년 내내 무덥고, 그중의 절반은 하루 한 번 장대비가 쏟아지는 '우기'인 이 나라는 여름 극혐 종자인 나에게 있어 최악의 선택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 있다. 그것도 십 년째.
그날 나에게 허락된 재수는 극소량이었다. 차이나타운에 두부를 사러 가고, 주차 자리가 없어 근처의 공원에 차를 세워 둔 것까지는 좋았으나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갑자기 차에 시동이 안 걸렸다. 배터리 문제가 아닌지라 꼼짝없이 정비소가 와야 했다. 해가 직각으로 내리꽂는 섭씨 36도의 정오, 심지어 금방 돌아올 거라며 선크림도 안 바른 맨 얼굴에 휴대전화 배터리는 15%밖에 안 남은 상태···. 그야말로 환장의 조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뜨끈뜨끈한 벤치에 앉아 몸을 지졌다. 지글거리는 태양이 마치 스타워즈에 나오는 레이저 광선검처럼 두피를 찌릿찌릿 쪼아댔으나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넓고 낯선 공원은 나 같은 길치가 길을 잃기 딱 좋아 보였다. 더군다나 오늘은 재수가 없는 날이기도 하고.
다들 즐겁네, 나만 빼고.
억울해진 시선은 자연스레 공원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사람들로 옮겨갔다.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사람들, 롤러스케이트를 신어 어정쩡한 자세로 걷는 아이들과 공원 한쪽에 개 놀이터를 짓고 있는 인부들. 벌겋게 달아오른 그들의 얼굴, 옅은 땀냄새, 작게 터지는 웃음소리. 까치발을 한 채 식수대에 입을 들이대는 십 대 청소년들의 깜찍한 옷차림과 푸릇한 잔디밭에 앉아 쯔쯔가무시 병 따위 생각지 않고 맥주를 들이켜는 연인들까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과 방식으로 무더운 한낮의 공원을 즐기고 있었다. 뜨거운 볕을 한껏 머금으며.
그 순간 문득, 내 자신이 이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처럼 느껴졌다. 이 나라에서 평생을 산다고 한들, 여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국 이방인으로 남을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달갑지 않은 생각은 하릴없이 정비소만 기다리는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나는 파나마에 살면서도 이곳이 늘, 남의 땅 같았다. 파나마 국적의 남편과 결혼을 하여 영주권까지 받은 상태인데도 이곳을 '언젠가 떠날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왜일까. 어쩌면 여기가 내가 싫어하는 여름의 나라이기 때문일지도, 혹은 나고 자란 고향, 그러니까 사계절을 품은 땅에 대한 향수 때문일지도 몰랐다.
"Raspao, recien preparado, raspao."
(라스파오, 방금 갈은 라스파오.)
그때였다. 드르륵드르륵 낡은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얼음을 갈아서 시럽과 함께 먹는 중남미식 슬러쉬 '라스파오' 수레였다. 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뽐내는 아저씨는 벤치에 앉아 있는 나를 힐끗대며 계속해서 외쳐댔다. '라스파오, 라스파오' ···커다란 얼음덩이가 수레 위에서 반짝거렸다. 불현듯 언젠가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길거리 음식 잘못 먹으면 배탈 나. 특히 라스파오 같은 거는 까딱하다간 식중독이다.' 안 그래도 재수가 없는 날 배탈까지 나면 정말 죽고 싶을 것 같았기에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뙤약볕에 빠르게 녹는 얼음을 지켜볼 수만 없던 아저씨는 나에게 다가와 직접적으로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No quieres un raspao, señorita bonita? Es bien suave y super delicioso!"
(라스파오 하나 안 먹을래요, 이쁜 아가씨? 엄청 부드럽고 진짜 맛있어요.)
···이쁜 아가씨? 순간적으로 혹했으나 나는 입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인자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에 밴 땀을 팔로 스윽 닦더니 스몰 토크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날이 무척 덥네요.', '그렇네요', '이런 날엔 손 쓸 방도도 없이 얼음이 금세 녹아버리죠', '그렇겠네요', '아까워요. 얼음일 때 맛있는 라스파오를 먹어야 하는데, 물이 되어버리면 끝이잖아요.', '... ...', '그렇지만 오늘 같이 더운 날이야말로 내가 필요한 날이지요.'
이게 호객행위인 건지 진심을 담은 한탄인지 구분하기도 전에 난 이미 지갑에서 돈을 꺼내고 있었다. 아저씨는 다시 한번 예의 그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재빠른 동작으로- 얼음을 갈기 시작했다. 삭삭삭, 소릴 내며 깎이는 얼음이 고깔 모양의 기구에 차곡히 쌓였다. 보기만 해도 내 살갗을 덮은 더위가 긁혀나가는 것만 같은 시원함이 느껴졌다. 아저씨는 특별히 더 주는 거라며 벤티 사이즈의 컵에 얼음과 딸기 시럽을 듬뿍 얹어 내게 건넸다. 그리고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달려온 개가 나를 덮쳤다.
귀가 펄럭이는 래브라도는 나를, 더 정확히는 내게 엎어진 라스파오를 허겁지겁 핥았다. 악 소릴 지르며 주인이 황급히 다가와 개를 떼어내고, 라스파오 아저씨가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한 번 달콤함을 맛본 래브라도는 주인의 말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개의 침인지 라스파오인지 모를 끈적함에 등골이 서늘해져 아무런 반응도 못했다. 어느새 롤러스케이트를 탄 아이들까지도 합세해 이 상황에 까르르한 웃음을 보탰다. 주인이 바닥에 몸을 다 던져 개를 제압하기 전까지 소동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평소라면 분명 당황스럽고 기분 상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이 상황이 웃기고, 내 꼴이 웃기고, 어떻게 오늘 하루 이렇게 되는 일이 없나 싶어 웃음이 터졌다. 라스파오 아저씨가 나를 일으켜 세우며 '괜찮냐' 물었다. 내가 푸흐흐거리자 아저씨도 덩달아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는 개 주인도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재밌는 구경거리를 맞닥뜨린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게 무슨 '몰래카메라'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냐 싶었지만 처음 본 사람들과 신나게 웃다 보니 마음에 졌던 그늘이 조금쯤 개이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하고 또 아주 약간은 어이가 없었다.
"Este tipo se porta muy bien normalmente..."
(얘가 원래는 안 이러는데...)
수돗가에서 대충 씻고 돌아서는데 개 주인이 사과를 건넸다. 나는 정말 괜찮았기에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 사이 아저씨는 새로 간 라스파오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아저씨는 씨익 웃기만 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아저씨가 만드는 걸 먹고 배탈이 날 리 없어···. 개 주인은 가방에서 꺼낸 물티슈 한 통을 내미는 것도 모자라 자기 번호까지 알려주며 혹시 어디가 아프면 연락하라고 했다. 모두가 친절했고, 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다시 벤치로 돌아와 앉았다.
조금 녹은 라스파오는 물에 시럽을 탄 맛이었지만 더위를 식히기 좋은 맛이기도 했다. 더 정확히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만들어진 맛 같달까. 계속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정비소가 어디쯤 오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얼마든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조금쯤 파나마를- 이 여름만 가득한 나라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겠단 예감이 스쳤다.
https://brunch.co.kr/@irene-persona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