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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물맨 Mar 10. 2024

새치기

인도 그림일기 2012

바라나시행 기차표를 끊을 때였다.

항상 그렇듯 긴 줄과 개미떼 같은 사람들 사이에 우린 조금 예민해져 있었고, 예민한 사람은 역시 우리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설명을 먼저 붙이자면 인도에서 기차를 탈 땐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워낙 땅덩이가 커 기차를 타면 기본 15시간 이상을 가는데, 상상 이상으로 불편하고 찝찝한 잠자리에 심지어 당최 어느 역에 정차하는지 그 흔한 안내방송도 해주지 않아 늘 긴장 상태로 쪽잠을 채워야 했다. 게다가 무임승차가 태반인 기차 안에 소매치기는 옵션이니 그 쪽잠마저 도무지 맘 놓고 청할 수 없고, 승차권 구매는 또 어찌나 까다롭고 어려운지(영어와 힌디에 능통한 정림이도 기차표구입은 극상의 난이도라 평했다.) 모두가 예민해져 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여유로운 사람들은 늘 오지랖 넓은 인도인들 뿐이었다. 연착이 돼도 노 프라블럼 프라블럼이 생겨도 노 프라블럼.. 남의 프라블럼에도 노 프라블럼..




어찌 됐든 각자의 예민한 에너지를 마구마구 뽐내는 여행자들 사이에, 정확히 말하면 우리 바로 뒤에. 얼핏 봐도 상태가 불안정해 보이는 백인 남자가 있었다. 아마도 사십 대 초중반 키는 백구십 전후에 장발의 기름진 금발. 왕년에 보디빌딩 깨나했지만 근 오 년간은 칼로리 섭취에만 몰두하고 있는 듯 녹은 근육 위로 거죽이 거대하게 늘어진 가슴과 팔뚝.


등에 두개골이 영롱한 자수로 박힌 청 조끼와 꽉 끼는 바지엔 학대당하는 바지에 걸맞게 흡사 고문도구처럼 보이는 수많은 체인들까지. (틀림없이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한 손에 빅맥을 든 채 캘리포니아 서부 2781289번 도로를 질주할 것이다.) 너무나 뻔한 클리셰이지만 너무나 뻔해 위압감이 드는 그는 울긋불긋 상기된 얼굴에 육중한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욕을 내뱉고 있었다. 기차표 작성지와 외로이 씨름하며.


그렇게 끙끙대고 뻑뻑대는 그에게 한 인도 노인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쉬지 않고 힌디로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그의 반응에는 아랑곳 않고. 분명 불쌍한 외국인을 구제하기 위한 선량한 의도였겠지만,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격양된 목소리와 호전적인 제스처로 왓? 왓?을 반복하던 금발의 전사는 이내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한마디를 뱉어냈다.


-우쥬 플리즈 셧업 뻑킹 올드맨???

우쥬. 공손하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귀의 성능을 스스로 의심할 새도 없이 곧바로 우릴 밀치며 새치기를 했다. 인과관계가 전혀 성립하지 않아 보이지만, 퍽킹 올드맨이 그에게 말을 걸었고 우린 새치기를 당했다.


하지만 우린 패기 넘치는 22살 소년 둘. 카페에 노트북은 두고 다녀도 목 좋은 자리는 포기하지 못하는 한국인. 곧바로 항의하지 않고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것이다.


-헤이 맨..


사실 헤이 프렌드라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의 용감한 컴플레인에 친절한 답변은 곧바로 돌아왔다.


-왓? 셧업 뻑킹 옐로 스팅키


??

노랗고.. 냄새나는.. 뭐?

어떻게 봐도 당신이 더 노랗고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잠시, 삼류 갱스터 무비에나 나올 법한 범 휴머니즘적 대사를 실제로 들은 나는 분노하여 곧바로 또 이렇게 생각했다.


'아 어쩌면 이 남자는 트리플 H가 아닐까..'

(나는 골드버그 팬이었다.)

(프로 레슬러 트리플 H)


그의 믿기 힘든 발언 뒤 매표소 앞엔 싸늘한 정적이 흘렀고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태여 하지 못했다고 하진 못하겠다. 그렇게 우린 조용히 '선의에 의한' 양보를 해주었고, 한동안 정림이와 나 둘 사이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리고 정림이는 그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랬다. 사실 인종차별이란 상대와 상황과 장소와 나의 피지컬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것이었던 것이다. 물론 헛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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