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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물맨 Mar 07. 2024

꽃 파는 아이들.

태국 그림일기 2011.


10년 전 카오산에는 꽃 파는 아이들이 있었다. 열 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 꼬맹이들이 둘둘씩 붙어 장미송이 다발을 들고는 천진한 미소와 화려한 언변으로 여행자들에게 내기를 걸곤 했다. "락 시져 페이퍼 락 시져 페이퍼." 내가 지면 장미를 사줘야 하고 내가 이겨도 곧장 손가락 씨름으로 2라운드를 시작해야 하는 이상한 경기.

물론 2라운드에서 패배해도 얄짤없이 장미를 사야 했다. 장미 한 송이치곤 조금 터무니없는 가격과 불공정한 내기에도,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아이들의 천진함 뒤 고된 처지에 지갑을 이미 열어두고 경기에 임하는 듯했다.


그러나 미리 열어둔 지갑이 무안하도록 조약돌만 한 아이들의 엄지손가락은 물수제비처럼 현란했고, 나중엔 한 번만 이겨보자 용을 쓰고 덤벼도 이길 수가 없었다. 믿기 힘든 실력에 패배 후 난, 얘네도 지들 나름의 당위를 보여주려 꽤 애쓰는구나 하고 멋대로 생각했다. 그리곤 곧 다시, 얘들과 이런 생각은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닌가 어울려선 안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또 맘대로 해버리곤 왠지 심란했다. 어쨌든 그렇게 우린 양손에 느닷없는 장미를 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얼마 후 밤 요깃거리 좀 사자고 편의점에 나오니, 다시 보니 남매인 듯 한 좀 전의 아이들이 장을 보고 있었다. 반가움에 무심코 인사를 건넸지만 아이들의 표정과 말투는 몇 시간 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격무에 찌든 직장인의 무표정 혹은 퇴근길 아이돌의 파파라치 사진에서나 볼 법한 얼굴이랄까. 조금 놀랐지만 짐짓 그러려니 했다. 그래 우리에겐 여행지의 귀여운 이벤트였지만 쟤들한텐 생활이 걸린 생존게임이었겠지. 그렇게 건조한 인사를 나누고 이내 내 간식을 고르는 데에 집중했다. 하지만 주완이에겐 그게 끝이 아니었다보다. 빵을 고르면서도 남매에게 눈을 못 떼던 주완이는, 결국 계산대 앞의 아이들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주춤주춤 돈을 건넸다.


-얘들아 이걸로 사.


둘은 잠시 당황하더니 복잡 미묘한 표정을 띠곤 주춤주춤 돈을 받아 계산한 뒤 땡큐. 를 짧게 뱉고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고지식했던 스물한 살의 나는, 고리타분해 보이는 말들을 곧바로 주완이에게 퍼부었다.


- 야 씨바 니가 뭔데 쟤들한테 돈을 주냐? 쟤네가 거지야? 나름 벌어본다고 장미 들고 이리저리 쏘다니며 애쓰는 애들을 왜 니가 동정을 하냐? 너무 거만한 거 아냐? 쟤네가 마냥 고마워할 것 같냐? 니가 인마 순진한 애들 다 망치는 거야 어쩌고 저쩌고 재잘재잘..


원래도 말이 많지 않은 주완이는,


- 그냥 쟤네가 안쓰러워서 사주고 싶었고 난 잘못이라 생각 안 해.


짧게 말하곤 우린 며칠간 어색했다. 계속된 캄보디아 일정에서도, 나는 해맑은 얼굴로 액세서리를 파는 아이들에게 괜히 평소보다 인색하게 굴며 지갑을 싸맸다. 마치 주완이에게 내 말이 맞다는 걸 몸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양, 난 언행일치가 이렇게 잘 되는 사람이야 하고 증명하려는 듯.


그 뒤로도 방랑벽이 있는 우리 둘은 몇 년 간 각자 때론 함께 몇 번의 여행을 더 겪었고,

년 전 술자리에서 문득 그때의 얘기가 나왔다. 내가 먼저 말했다.


- 야 가끔 그때 일 생각해 보면 내가 괜히 오버한 거 같음 꼬맹이들 그냥 사줄 수도 있는 건데.

팔찌도 좀 더 팔아줄걸..


그런데 놀랍게도 주완이가 이리 말하더라.


- 그냐? 난 지금은 반대로 생각하는데. 여기저기 다녀보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 같아.


- 그래? 음..


흐음..


그리곤 항상 그렇듯 이내 주제를 돌렸다. 또다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누구 말이 맞는진 모르겠다. 우리의 얕은 생각은 술잔 속에서 늘 흔들리곤 금세 사라지까. 다만 지금의 나라면 적어도 그 아이들에게 그저 간식 한 끼 대접하려던 주완이의 마음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당시의 나는 이성적인 척 객관적인 척 스스로 포장하길 좋아했고, 아마 주완이는 그저 좀 더 이타적이고 솔직했을 뿐이었을 거다. 때로 복잡한 생각들이 마음 내키는 선의에 제동을 거는 즈음이면 그날의 카오산이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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