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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yunion May 01. 2023

학습된 무기력과 불투명한 미래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 _ _ )

솔직히, 시민단체는 조금 다를 줄 알았다. 

그렇다고 마냥 꿈에 부풀어 입사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 세 가지는 다른 곳보다 나으리라 기대했던 것 같다.


1. 평등한 관계

2. 수평적인 의사소통 구조

3. 유연한 조직 체계


기대에는 필연적으로 실망이 따르는 걸까. “까라면 까야죠” 자조 섞인 활동가의 말에 “아주 훌륭한 태도이십니다”라고 답하는 상사의 모습은 나름의 각오(?)에도 불구하고 제법 이질적이었다. 이 땅의 민주화와 언론개혁을 외치면서, 구성원들에게는 까라면 까야 한다는 관행을 이야기하다니.  


단체에 소속감이 생기려 할 때마다 어김없이 이질감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다. 체계 없이 진행되는 업무를 마주할 때마다 그랬다. 업무 분담의 체계가 없으니, 그때그때 시간과 능력이 되는 활동가에게 업무가 배정되곤 한다. 활동가의 상황과 의사는 배제된 채 말이다. ASAP로 처리해달라며 불쑥 업무를 건네는 상사의 모습에 악의는 없었다. 그저 이 업무를 당장 맡아줄 누군가를 구하면 그만이니까. 


현안에 쫓겨 일을 나눠주는 상사에게 “NO”라고 말하는 건 쉽지 않다.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업무를 감당하며 지쳐가는 건 언제나 일선 활동가들이다. 하지만 바쁘신 분들에게 활동가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업무 효율 감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닌 듯싶다. 구성원의 사기와 효율을 떨어트리는 관행을 고칠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넘어가기엔 활동가에게는 전혀 좋은 게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모든 의사결정권이 리더에게 수렴하는 구조도 이질적이었다. 아무리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새로운 기획을 내도, 결국 같은 사람이 최종결정을 하니 비슷한 결과물이 생산될 수밖에 없다. 활동가들이 열정을 갖고 “일단 해보자”며 시작해도, “이게 정말 될까”, “결국 위에 올라가서 막힐 텐데” 하는 체념으로 귀결된다(아래 이미지와 같은 단계를 거친다). 활동가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혹은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반려되는 사업이 많다. 


1. 의욕만땅으로 회의 시작 → 2. 이상한 피드백 받으며 고요한 외침 시작 → 3.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맑은 눈의 광인으로 도약


가장 나쁜 경우는 결정권자가 단순히 “까먹어서” 사업이 증발될 때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결국 활동가들은 애먼 데 에너지를 쏟길 거부한다. 당장 눈앞에 놓인 업무에만 집중하는 것이 자신의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걸 터득한 거다. 학습된 무기력이 사무처를 지배하고 있다. 


서커스단에서는 코끼리를 길들이기 위해 어릴 때부터 아기 코끼리의 뒷다리를 말뚝에 묶어둔다. 아기 코끼리는 안간힘을 써도 줄을 끊을 수 없음을 학습하게 되고, 결국 성장하고 나서도 줄을 묶어둔 말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애를 써도, 안 된다는 것을 이미 학습했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더 이상 도망칠 시도를 하지 않는다


가끔 나를 포함한 사무처 활동가들이 줄에 묶인 코끼리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의 상식에서, 시선에서는 훌륭한 아이디어가 의사결정권자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는 경험이 반복될 때마다 활동가들은 말뚝 근처에서 머무르는 코끼리가 되곤 한다. 독단적 결정과 하달되는 지시가 있을 때면, 나는 활동가들의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길, 이번 일로 많이 지치지 않길 기도하게 된다.


기대와는 다른 조직과 사람의 면면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조용히 실망했다. 

동시에 조직의 미래와 사람들의 마음을 걱정했다.


여태껏 하던 대로만, 할 수 있는 것만 하다 보면 결국 조직은 한 곳에 정체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돌파구를 제시하고 과감히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 아래에서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나와도 실현되기 어렵다. 지속가능하려면 변화해야 하고, 변화하려면 의지가 필요하다. 그 의지의 첫 시작은 ‘경청’일 것이다. 변화의 주체이자 대상인 사람들은 말하는 시간을 줄이고 듣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꺼이 듣는 리더
자신의 말에 대한 이견을 경청할 줄 아는 리더
구성원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소통하는 리더
그런 리더가 내리는 합당하고 합리적인 업무 지시

내가 바라는 건 대단하거나 거대한 변화가 아니다.


조직도 결국 사람이다. 까라면 까라는 폭력적인 명제로 노동자를 갉아먹는 관행이 사라지길 바라며.

조직에 소속된 사람을 믿고, 귀 기울이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은 것이 큰 바람은 아니길 바라본다. 


p.s. 이 글을 읽는 모두가 행복한 노동절을 보내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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