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그 이름, '노조'
코로나19는 다시 확산세에 접어들었고, 누리꾼들은 제대로 된 정부 방침 없이 사실상 ‘각자도생’하라는 거 아니냐고 비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도생하던 나도 최근 코로나에 걸렸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우리 노조 조합원 중 누군가 나 때문에 코로나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지?’였다.
일주일 동안 조합원들에게 개그를 보여주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내 개그에 조합원들이 매우 열심히(?) 호응해주었기 때문이다. 한 조합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장 열심히 호응해주던 조합원 말이다. 퇴근길에 나의 작은 말장난에도 빵빵 터지며 웃어주던 조합원은 얼마 안 있으면 훨씬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난다. 안 그래도 폭우로 재택근무하느라 며칠간 못 본 터라 출근하면 곧바로 선사할 웃음보따리 말장난을 준비해놓았는데,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보여주지 못하게 됐다. 아쉽고 슬펐다. 문득, 내성적인 성격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우리 노조에 스며들게 되었나 생각해보게 됐다.
2019년 입사한 나는 ‘각자도생’의 표본이었다. 없는 눈치를 애써 끌어 모으며 어떻게 해야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한참 앞서가는 동료들을 따라가기엔 무리였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보통 자기 회사를 부를 땐 회사 이름으로 지칭하기 마련이지만, 난 꼭 ‘사무실’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회사에 정이 없었다. 상사가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리거나 예의 없는 언행을 보여도 ‘왜 하필 그 대상이 나였을까’,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생각하며 나 자신이나 주변 상황만 탓했다.
어느 날, 동료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부당한 지시나 황당한 피드백에 조목조목 논리적인 근거를 대며 반박했다. 통쾌했다. 속으로는 말하고 싶어도 분위기를 망칠까 봐, 나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될까 봐,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하던 걸 그 동료가 말해줬다. 고마웠다. 하루는 고마움을 표현하니 그 동료가 당시 유행하던 책제목으로 답했다. 「90년생이 온다」(그 동료가 90년대생이다.).
다른 동료들도 열심히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상사의 권위는 힘이 셌다. 부당한 지시나 황당한 피드백이 권위라는 탈을 쓰고 내려오는 바람에, 논리적인 근거로도 당해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정규직화 사태, 이른바 ‘인국공 사태’가 우리나라를 휩쓴 후였다. 상사는 상시지속 업무에 속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고 말했다. 노동자 권리를 중시하는 시민단체에서 비정규직 채용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던 정규직, 비정규직 동료들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상사는 단 몇 개월 만에 사무실 이전과 예산 부족을 이유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비정규직 채용은 않겠다고 선언했고 예산은 없다고 설명했으니 남은 건 단 하나였다. 사무실 이전과 맞물려 비정규직 동료들은 사실상 해고당했다. 근무기간 ‘인턴’이냐 ‘팀원’이냐 호칭을 두고도 원치 않는 씨름을 했던 비정규직 동료들과 마지막 만남에서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당신들은 내게 인턴도 팀원도 아닌 동료였다고.
우리들은 그저 뒤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니 적어도 나는 우리가 그것밖에 할 수 없다고 믿었다. 맨 처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그 동료는 생각이 달랐다. 좋은 동료들이 더 이상 부당한 지시나 황당한 피드백을 못 이기고 떠나가지 않도록 최소한의 보호막을 만들어주자고 생각했다. 다른 동료들과 같이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다짐하고 열심히 준비했다. 그렇게 열심히 차린 밥상을 내밀며 나에게 물었다. 너의 숟가락을 올려 함께하겠냐고 말이다. 내 대답은 당연히 ‘오케이! 콜!’이었다. 그렇게 집행부 5명 포함 총 10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우리 노조가 출발했다.
노조만 만들면 모든 게 일사천리일 줄 알았다. 노동 이슈가 떠오를 때마다 노동자 권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앞장선 시민단체니까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노조 요구에 어렵지 않게 동의해줄 거라 생각했다.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사측 태도가 불성실해서 불성실하다고 성명 한번 썼다가 사과를 요구받는가 하면, 사과를 받지 못한 사측 교섭위원이 기어코 전원 사퇴하는 일도 있었다. 황당했다. 사측이 교섭을 지연시키려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는 게 어려웠다.
늦어도 올 상반기까지는 마무리될 줄 알았던 단체교섭은 벌써 10차를 넘겨 11차까지 진행됐다. 가장 가슴 아픈 건 그 사이 조합원이 10명에서 8명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곧 7명이 될 예정이다. 집행부는 5명인데, 일반 조합원은 2명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모두가 노조라는 동아줄을 잡고 단체교섭이 마무리될 그날을 기다리며 같은 마음으로 버텨줄 줄 알았다. 하지만 단체교섭의 끝은 잘 보이지 않았고 조합원들은 저마다 각자의 힘듦이 있었다.
최근 들어 회사의 황당한 채용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다. 비정규직 채용을 않겠다고 선언한 상사가 버젓이 비정규직을 채용한 것이다. 노조의 문제제기에 상사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상사의 상사인 대표는 비정규직 채용 불가 원칙은 동의하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이 대표가 아닐 때 얘기라 모른다고 발뺌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부가 져야 할 책임은 연속성을 갖는다. 하물며 대표가 바뀌었다고 회사가 지켜야 할 약속과 책임을 대표가 모르쇠로 발뺌해도 되는 건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조합원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단체교섭만 마무리되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고 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인다. 단체교섭이 빨리 마무리되면 좋겠다. 조합원들의 퇴사 염원이 그저 푸념과 너스레로만 남았으면 좋겠다. 난 ‘우리’라는 말을 아무데나 붙이지 않는데, 회사에도 안 붙이던 ‘우리’라는 수식어를 우리 노조에는 쉽게 붙일 수 있었다. 각자도생만 알던 내가 함께 사는 법을 우리 노조를 통해 배웠다. 난 아직도 노조에서 배울 것이 많다. 노조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은 올렸는데 사실 아직 한 술도 뜨지 못했다. 고로 난 아직 배고프다. 우리 조합원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