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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yunion Jul 07. 2023

노조 할 결심(중)

퇴사선물이라고 할까

https://brunch.co.kr/@mnz2021/14

앞에 글에서 이어집니다.




여전히 내가 시사교양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 궁금했다. 정확하게는 정규직 PD가 아닌 계약직, 프리랜서 PD여도 시사교양 PD가 되고 싶은 건지.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주 6일 12시간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는 조연출 생활을 그만둬야 했다. 통장에 찍힌 글자로만 존재했던 내 첫 회사의 파견사업주와는 연락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프로그램 담당 CP 선배를 찾아가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니 20대의 나는 당돌했네. 이제 막 들어온 20대 조연출이 다른 조연출 선배나 연출 선배를 다 건너뛰고 CP를 찾아가다니, 할 말 있다니 흔쾌히 자리로 오라고 해준 선배 이제야 감사인사를 전해요. 몇 달 일하고 나간 뜨내기 조연출을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여러 말을 해줬던 거 같은데 그중 기억이 나는 건 몇 개 없다.


“꼭 언시로 PD 할 생각 안 해도 된다”

‘그런데 선배는 공채 출신이잖아요’


“ㅇㅇㅇ처럼 프리로 인정받으면 여기저기서 불러주고 돈도 훨씬 많이 번다”

‘그 선배 일 잘하고 돈 잘 버는 거 저도 아는데 그 선배 말고 다른 프리랜서 선배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순간 바로 사라지는 건가요?’


선배는 내게 일하면서 무엇이 제일 힘들었는지도 물었는데, 나는 이때다 싶어 지나치게 많은 노동시간을 이야기했다. 물론 구구절절하게. “일이 많을 땐 저도 당연히 집에 갈 생각을 안 하는데요. 주 6일 중에 가끔은 우리가 할 일은 끝냈는데 선배들이 시킬 일 대비해서 대기하고 있을 때가 많아요. 근데 저랑 ㅇㅇㅇ 선배랑 조연출이 둘이나 있는데 둘 다 대기하고 있는 게 넘 비효율적인 거 같아요. 그렇다고 저희끼리 정해서 한 명을 들여보낼 수도 없고요. 저희는 선배들이 ‘오늘은 들어 가’라고 할 때나 퇴근하거든요” CP는 막내조연출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고, 나는 함께 일하던 조연출 선배와 새로 들어온 내 후임에게 주 5일 근무일을 선물하고 방송국 계약직 생활을 그만뒀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배우고, 그 배움을 통해 변한다.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물론 있지만 나는 방송국 비정규직 노동자 생활을 통해 노동의 영역에도 차별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모든 노동은 가치가 있지만, 사회가 인정하는 가치의 크기는 다르다. 가치의 크기는 임금이나 노동환경 등을 결정한다.’ 언론사 공채를 통해 입사했으면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부분이다. (나는 꽤나 오만한 사람이어서 인생이 잘 풀리면 이게 다 내 능력 덕이라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언론고시를 통해 정규직 PD로 입사했다면 다른 비정규직 PD들을 보고 ‘나도 매일 논작스터디, 면접스터디 하고 얼마나 노오력해서 입사한 건데! 어디서 언론고시 안 보고 그냥 들어온 사람이 나랑 같은 피디인 척이야! 이건 차별이 아니라 차이야 차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짧은 기간이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로 차별을 받아봤고 (누군가는 차별이 아니라 합리적 차이라고 하겠죠. 반박 시 당신 말이 맞습니다!) 이 경험은 내게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차별을 - 특히나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을 -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인턴’의 정의



몇 년 후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원봉사자인 줄 알던 내가 시민단체의 임금 노동자가 됐다. (‘운동 경력’을 중요시 여기던 동료 중 한 명이 이제 막 입사한 내게 ‘어떤 운동하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발레 조금, 헬스 조금 해봤어요’라고 답하던, 운동을 ‘무브먼트’가 아니라 ‘스포츠’로 파악하던 애였음.) 그 당시 단체의 규모는 내가 퇴사하던 시기보다 2~2.5배는 컸는데 (내가 입사했을 때 나와 함께 새로 입사한 사람이 10여 명 정도였는데 이 숫자는 내가 퇴사할 때 전체 활동가 수와 비슷하다) 단체에 속해 노동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이 20여 명은 됐다. 그중 40프로는 정규직 ‘활동가’였고, 나머지 60프로는 계약직이었다. 짧게는 n개월에서 길게는 n년으로 계약을 체결해 일하는 이들을 우리는 ‘인턴’이라고 불렀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은 공간이라니 여기도 방송국과 다를 게 없구만’ 처음 동료들을 소개받은 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나는 자주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직 노동자의 생일은 안 챙기고 정규직 활동가의 생일파티만 할 때, 상시지속 업무를 시키고 있는 계약직 노동자의 계약이 어떨 때는 당연 연장되고 어떨 때는 - 계약종료 당일까지 생각 중이라고 하면서 애태운 다음 - 당일에 겨우 연장계약을 할 때, 연속적 계약으로 1년 이상 일한 계약직 직원의 퇴직금을 그 사람이 여러 번 요청하고 증명해서 겨우 받았을 때… 내가 서러웠고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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