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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yunion Jul 14. 2023

노조 할 결심(하)

나갈 때 나가더라도 노조는 만들자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서럽고 화난 적 없는 노동자가 있을까. 단연컨대 없을 것이다. 노동자인 나는 계약직을 대하는 조직의 태도를 접할 때뿐만 아니라 여러 이유로 종종 서럽고 화가 났다. 그럴 때마다 내가 했던 건 회의시간에 혹은 메신저로 모두가 볼 수 있게 종종 내 생각을 말하는 거였다. (MZ세대라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산다고 생각 말길. 말을 꺼낼지 말지 수십 번 고민하고 내뱉은 말들입니다. 정규직이라고 해서 안 짤리는 사회도 아니고, 튀는 행동하면 관심만큼이나 미움도 많이 받는 거 누가 모르나요!)


“채용공고에 채용조건이나 근무환경을 자세하게 쓰면 안 될까요? 다른 기업들이 그런다고 해서 우리 단체도 똑같이 해야 하나요? 그렇다면 자세하게 써주는 곳들은 뭐죠?”

“인턴이고 활동가고 구분 없이 같이 일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생일을 챙기면 좋겠습니다. 챙길 여력이 없다면 제가 맡아서 할 수 있어요”

“인턴들 계약 종료일이 다가오는데 미리 연장 여부를 전달할 순 없나요? 자주 연장이 되는 상황이라 당연 연장을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요”

“……”

“……….”

”…………….”


내 의견(이 물론 다 맞는 건 아님.)은 바로 먹힐 때도 있었고, 토론이 되어 한참 뒤에 결론이 나는 경우도 있었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결론이든 상관없이 나 스스로는 의견을 말하는 행위를 통해 불편한 감정을 그때그때 해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유, 조직에 문제가 많네. 답이 없다고 느껴지면 퇴사하자!’라는 생각까지는 했어도 ‘아유, 조직에 문제가 많네. 노동조합을 조직하자!’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는 거다.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은 무언가가 내 마음에 한 겹 한 겹 천천히 쌓이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앞으로 나올 내용은 제가 보고 듣고 겪은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작성된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차곡


근로기준법 제93조에 따르면 상시 10명 이상 근로자(라는 단어보다는 노동자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만 법에서 통용되는 단어이기도 하고, 실제로 웬만한 노동자들이 근면성실하게 일하기 때문에 쓰겠음.)를 사용하는 사용자는 취업규칙을 작성해 고용노동부에 신고해야 한다. 우리 사업장은 과반수로 조직된 노조가 없기 때문에 작성 시 근로자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하고, 그 의견을 듣는 과정에 갈등이 생겼다. 기존 노동자들의 근로계약에 대단한 복리후생이 있는 것도 아녀서 불이익한 변경이랄 게 없지만 (불이익 변경이었으면 과반 근로자 동의 얻는 게 필수여요!) 취규는 사용자 마음대로 작성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근로자들은 작은 단어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결국 ‘노조 없으면 취업규칙 작성할 때 의견 안 들어도 되는데 우리니까 그래도 활동가 말 들어보는 시간을 가진 거’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차곡


한 노동자가 시말서를 제출했다. 싸게 구입하려고 해외 배송 시킨 물건이 오지 않아서. 결제를 위해서는 결재를 받았을 텐데, 결제를 결재해 놓고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일을 진행시킨 노동자 탓이 됐다. 무언가를 잘못 주문한 일이 우리 조직에서 이번 한 번만 있던 일일까. 이전에도 시말서를 썼나. 시말서의 정의가 뭐지. 결재를 한 사람도 잘못이 있는 거 아닌가.


차곡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징계위를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진단서를 제출했다. 분명 징계위에 들어간 사람들만 알고 있어야 하는 사실인데, 전혀 관련 없는 동료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신과 진료가 부끄러운 사실은 아니지만 난 그 사실을 굳이 동료와 공유하고 싶지 않았는데.


차곡


한 노동자가 약 2주 동안 무단결근했을 때 조직은 그를 붙잡았고, 그의 무단결근은 사후에 모두 연차휴가 처리가 됐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번아웃 온 거까지 생각해 주는, 사람을 소중하게 아는 조직이로군. 저게 특혜라면 문제인데 모든 노동자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면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한 노동자가 일주일 동안 연차휴가를 신청했다. 휴가는 반려당했다. ‘그렇게 연달아서 휴가를 주는 회사는 없다’면서. 심지어 그 노동자가 신청한 휴가는 직전 연도에 연차휴가를 소진 못한 노동자가 많아서 미지급 연차휴가수당을 지급하는 대신 다음 연도 1월까지 연장해서 소진하자고 사용자와 노동자가 합의한 사항이었는데.


차곡

 

한 노동자가 아파서 조퇴하길 원했다. 그날 발행하기로 한 콘텐츠 마감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약속을 한 마감일을 어기는 일은 (원래 약속은 아주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인력은 부족하고 일은 많은 우리 조직에서 어쩔 수 없이 종종 일어나던 일이기에 이번에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대직자를 구하고 나서야 조퇴를 할 수 있었다.


차곡


전체 회의에서 긴긴 논의를 통해 정한 내용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왜 바뀌었는지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차곡

차곡

차곡

차곡


차곡차곡 쌓인 그 무언가들이 마침내 내 마음을 가득 채웠을 때, 이것은 마침내 결심이 되었다. 노조 할 결심. 동료들도 나처럼 무언가 마음속에 쌓고 있진 않을까. “저랑 노조 하실래요?”라는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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