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선 극복기
“습진이 아니라 건선이네요.”
습진이 아닌 줄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습진이라기엔, 붉은 반점이 무섭게 다리에 퍼지기 시작했고, 두껍고 하얀 각질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처음 겪어보는 몸의 반응은 습진이라던 의사 선생님의 말이 틀렸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인터넷에서 알게 된 건선이라는 피부질환은 내 다리 속에 있는 모양과 꼭 닮아있었다. 아니길 바랐다. 차라리 습진이었으면 했다. 그런 마음으로 재차 병원을 찾아간 것이었다. 저번처럼 그냥 습진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건선은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깐. 죽을 병은 아니지만, 이전과 같은 생활을 하기 힘들다는 것도 알아 버렸으니깐.
건선이라는 판정을 받은 순간부터, 온갖 후회가 밀려왔다. 처음 몸에 붉은 반점이 생겼을 때, 대수롭지 않게 어릴 적 앓던 아토피가 남아있던 것쯤으로 생각했던 나를,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라며 몸의 신호를 외면한 나를, 몸에 좋지 않은 것만 먹어대는 나를. 후회하고 자책했다. 결국 내가 자초한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후회가 곧바로 식습관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더한 외면과 숨김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더 꼭꼭 감추었다. 건선은 시위라도 하듯 다리 한 쪽에서 양쪽 다리로, 양쪽 다리를 넘어서 팔꿈치로, 그렇게 몸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반바지는커녕, 다리를 내보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벌게진 다리를 어쩌다가 보게 된 사람들은 한마디씩 거들었다. 내가 야채를 먹지 않아서 몸이 이 꼴이 난 것이라고. 그럴수록 나는 멋쩍게 웃으며 다리를 황급히 감출 뿐이었다.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건선이 번지기 시작해서 얼굴까지 나타난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었으니, 치료는 해야 했다. 건선을 치료하기 위해선 겉의 피부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몸속을 바꾸는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 야채는 먹지 못해도 쓴 한약은 먹을 자신이 있었다. 씹지 않고 삼키는 것은 가능했으니깐. 한약을 먹어서 내 몸을 바꾸자. 나름 근본적인 치료법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한약 하루에 세 번 가지곤, 매일 몸에 들어오는 안 좋은 것들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도 못 한 채. 당연히 몸이 좋아질 리 만무했다. 어리석은 생각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이어졌고, 결국 피부는 좀처럼 낫지 않았다. 악순환이었다. 피부과도 한의원도 포기했다.
발목을 다치면서, 마산에 있는 한의원에 가게 됐다. 건선 때문에 잔소리 듣는 것이 싫어 다른 한의원을 간다고 간 건데, 웬걸, 잔소리계 일인자를 만나버렸다. 다친 발목은 뒷전이었다. 건선에 관한 잔소리가 치료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잔소리는 한의원을 갈 때마다 계속됐다. 치료는 또 어찌나 잘하는지,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잔소리를 조금이라도 듣지 않으려면, 나는 야채를 먹고 현미밥을 먹고 고기를 멀리하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희한하게도, 조금씩 그런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현미 주먹밥을 찾아보고, 햄버거는 먹지 않는 방식으로. 물론 여전히 야채는 예외였다. 야채를 입에 넣으면 헛구역질을 해대는 내게, 고기를 멀리하는 것은 가능해도 야채를 가까이하는 것은 기적과도 가까운 일이었으니깐. 한의사 선생님은 몸속을 치료하면서 마음도 꿰뚫어 보시는 걸까. 이런 나를 보시곤, 무조건 야채를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도전해 보라고 하셨다. 김치만 먹어도 좋으니, 하나씩 천천히. 그 말에 마음이 동했다. 조심스럽게 야채라는 것에 더딘 걸음으로 다가섰다. 구운 마늘을 한 번 씹고 삼키고, 국에 있는 파 건더기를 들었다 내렸다 고민하다, 눈을 딱 감고 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날이었다. 남자친구와 친구네 커플과 스키여행을 가게 된쯤이. 여행의 묘미는 고기라고 했던가 혹은 운동 후에 먹는 고기는 최고라 했던가. 여튼 이 날 만큼은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만이 존재했다. 식탁에는 고기와 밥과 각종 야채들이 자리 잡았다. 그중에는 친구네 어머니가 싸준 깻잎무침도 있었다. 깻잎. 싫어하는 야채 중 상위권을 차지하던 녀석이었다. 깻잎 특유의 향이 싫었다. 늘 그렇듯, 녀석을 외면한 채, 고기만을 입으로 넣으려 했다. 그 순간, 잔소리꾼 한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하나 싸 먹어보고 별로면 안 먹으면 되지. 깻잎 하나에 고기 두세 점을 넣어 쌈을 만들어 먹었다. 질끈 감았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있었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다고? 이렇게 양념이 맛있다고? 장담컨대 그 식탁에 있던 어떤 야채보다 맛있었다. 김치는 좋아하는 난데, 그 깻잎을 맛본 순간부터 김치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깻잎에 고기를 싸먹었다. 처음에는 고기를 두세 점 올려 먹다, 두 점으로 줄이고, 한 점으로 줄이고, 마지막엔 깻잎만 밥에 싸서 먹었다. 내가 아는 밥도둑은 스팸이나 고기밖에 없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녀석이 ‘나 밥도둑이야’ 외치고 있었다.
새로운 음식이나 야채를 먹지도 않아도 이 세상에는 내가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이 많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권유해도, 내 세상을 넓히지 않은 채 그 안에서 즐길 뿐이었다. 좁고 닫힌 세상이었지만 부족하다고 느끼지 못했으니깐. 그런데 내 몸은 부족하다고 느꼈나보다. 버틸 만큼 버텼다고 참다가 건선으로 티를 냈나 보다. 이제는 좀 세상을 넓혀보라고. 음식을 먹을 때, 조금씩 야채를 곁들여 먹기 시작했다. 남들만큼은 아니지만, 상추 한 장, 마늘 한 조각. 고기 하나만 먹을 때보다 새로웠다. 쉽게 질리지 않았고, 소화가 잘 됐고. 음식에 대한 선택지가 다양해졌다. 그렇게 내 세상이 조금씩 넓어졌다.
이제는 밥맛없을 때면 깻잎이 생각이 난다. 내 세상을 넓혀준, 친구 어머니의 바로 그 깻잎. 그게 아니었다면, 여전히 야채를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만 가친 채로 힘든 발걸음을 계속했겠지. 야채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자책하지만, 여전히 야채를 먹지 않은 채로. 그렇게 또 다리의 붉은 녀석들을 방치했을 것이다. 또다시 야채가 버거워지고, 좌절할 때면, 한 겨울 그때에 쌈 싸 먹던 깻잎을 떠올려야겠다. 억지로 먹던 야채가 아니라 맛있어서 먹던 그 마음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