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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terist Nov 29. 2024

볶은 밥이 볶음밥이다.

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끼니때가 되었는데 딱히 집에 먹을 게 없었던 나와 아내는 간만에 배달음식을 시켰다. 그날의 선택은 처음 시켜보는 한 중국집. 아내는 늘 그렇듯 짜장면, 그리고 나는 긴 고심 끝에 볶음밥을 골랐다. 30분쯤 지났을까?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고 나는 무척 분노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 격렬했던 분노에 대한 이야기다.


'볶음밥'

이라 함은 기름에 볶은 밥요리를 일컫는다. 물론 누군가는 ‘꼭 기름에 볶아야만 볶음밥이냐? 난 그냥 기름에 안 볶아도 볶음밥이라 하련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언어는 사회적이고 그렇기에 볶음밥이라 함은 기름에 볶은 밥요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회상규상 적어도 아직까지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헌데 그날 내가 마주한 그 볶음밥은 어떠했던가? 간신히 구색을 갖추기 위해 궁색하게 올라 있는 극미량의 계란 부침과 거의 생당근에 가까운 당근 몇 조각, 그리고 민망할 정도로 적은, 역시나 거의 생파에 가까운 파들 (아마 설렁탕집에서 넣어주는 파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아래 깔려있는 누가 봐도 볶음밥이 아닌 거의 맨밥. 그건 기름 냄새조차 맡아보지 못했을 것이 거의 분명한 맨밥이었다.


분명 ‘볶음밥’이라 써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볶음밥’ 사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달되어 온 것은 볶음밥이 아닌 무척이나 선명한 기만이었다. 그리고 이런 선명한 기만을 마주하게 되면(심지어 이를 배달로 받게 되면) 누구나 환멸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기만이 불러온 환멸은 나를 분노케 했다. 그 분노는 단순히 볶음밥이 볶은 밥이 아님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볶음밥 한 그릇 때문에 내가 다시 한번 이렇게 인간 사회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 그 자체에 분노했다. 심지어 자의가 아닌 오롯한 타의에 의해 이런 환멸을 마주하게 되었기에 내 분노는 격렬했고 그 격렬함은 매우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성인이자 한 아내의 남편이기에 격렬한 분노를 겉으로 표출하진 않았다. 내 앞에서 묵묵히 짜장면을 먹고 있던 아내에게 내 분노의 정당함에 대한 부연설명을 조금 했을 뿐이다. 이건 결국 다 ‘책임감의 문제’며 우리 사회가 '책임감 부재 사회'가 되어버렸음을 바로 이 볶음밥(인 척하는 맨밥)이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노라고 말이다. 물론 현명한 나의 아내는 늘 그래왔듯 엄청난 동조도, 굳이 불필요한 반대도 하지 않은 채 적당한 리액션만을 보이며 짜장면을 마저 먹었고 난 얼굴도 모르는 그 중국집 사장에게 괜히 지는 것 같은 기분에 그 볶음밥(인 척 팔아먹은 맨밥)을 더 먹지 않고 대충 끼니를 때워버렸다.


물론 나도 안다. 사실 이게 비단 볶음밥 한 그릇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고작 볶음밥 한 그릇으로 그 중국집 사장에게 ‘책임감 부재 사회’의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결코 공정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세상엔 책임감 없이 행해지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볶음밥쯤 대충 팔아먹는 것은 어쩌면 정말로 별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여기까지 글을 쓴 후에 나는 글이 너무 격렬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잠시 머리도 식힐 겸 평소에 종종 챙겨보는 네이버 뉴스의 해외축구 뉴스 란을 쭉 훑었다.


그런데, 저 날은 날이 마침 날이었던 것일까?


하필이면 저 때의 내 눈에 볶음밥인 척하는 맨밥과 같이 책임감이 영 부족한 기사가 보인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는데 아무튼 그 맨밥 같은 기사의 내용인즉슨 이러했다.


유럽 챔피언스 리그(UCL) 조별예선에서 맨체스터 시티와 페예노르트가 맞붙었다. 맨시티가 3:0으로 앞서나갔으나 이내 한 골 두 골 따라 잡히기 시작했고 결국 3:3까지 따라 잡혀 두 팀은 결국 무승부를 기록했다. 맨시티는 최근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 5경기 연속으로 승리가 없었기에 맨시티의 실망감이 유독 컸다. 맨시티의 감독인 펩 과르디올라는 경기 후, 얼굴에 상처가 난 모습으로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는데 상처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너무 화가 나서 자해를 했다”고 말했다.


대충 이런 내용의 기사였는데 이 기사에서 내 눈에 훅 하고 보인 것은 바로 이 한 문장이었다.


UCL에서 75분까지 리드하다가 패배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


해외축구, 그중에서도 특히 UCL에서 기적 같은 극장골을 잘 집어넣기로 유명한 팀을 좋아하는 나는 저 문장을 보고 심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내 기억 속의 몇 경기를 끄집어냈는데 그 경기들의 내용이란 이러했다.


2013~2014시즌 UCL 결승전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전반 36분에 한 골을 넣어 1:0으로 앞섰으나 후반 93분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극적인 동점골을 허용했고 결국 연장전 승부 끝에 1:4로 패배함.
2021~2022시즌 UCL 준결승 2차전 :

맨체스터 시티가 후반 73분에 한 골을 넣어 1:0으로 앞섰으나 후반 90분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역시 극적인 동점골을 허용했고 결국 1:3으로 패배함.


혹시 내 기억에 왜곡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 다시 한번 저 경기들의 결과를 검색해보기도 했지만 내 기억에 왜곡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75분까지 앞서고 있다가 패배한 최초의 팀’이라는 저 기사 속의 문장은 명백한 거짓이었다.


심지어 나는 저 문장을 천천히 곱씹으며 이상한 점을 한 가지 더 찾아내기도 했는데 저 문장은 다시 보니 굳이 다른 팀의 과거 결과를 들춰내지 않더라도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순수하게 말이 안 되는 문장이었다. 생각해 보라. 3:0으로 이기고 있다가 3골을 내리 따라 잡혀 결국 3:3 무승부를 거뒀는데 대체 왜 75분까지 앞서고 있다가 '패배'한 최초의 팀이 된단 말인가? 그 어떤 3도 그 어떤 3보다 크거나 작진 않은데 말이다.


나는 이런 것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볶음밥보다도 훨씬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이가 책임의 지엄함을 가볍게 보거나 아예 보지 않거나 보고도 애써 외면하는 것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친구에게 안주 삼아 떠드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이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것일진대 어찌 이리 무책임할 수가 있단 말인가? 글을 만지는 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조금 더 개인적으로 솔직한 심정을 더해 말해보자면, 몇 명 읽지도 않는 글을 쓰는 나조차도 글을 쓸 땐 혹 여기에 틀린 정보가 있진 않나 수차례 검증을 거듭하는데 어떻게 돈을 벌며 글을 쓰는 이가 그리 가볍게 쓸 수가 있단 말인가.


안다. 결국 다 그놈의 돈 때문일 것이다. 책임감은 둥실 떠있는 개념이지만 돈은 늘 가까이하고 싶은 무엇이니까. 책임감을 갖고 산다는 건 무척 피곤한 일인데 이에 대한 보상은 딱히 만족스럽게 주어지지 않거나 아예 주어지지 않곤 하니까. 인사 고과와 연봉에 도움이 되는 건 더 많은 클릭수일 뿐, 더 정확하고 좋은 정보는 아닐 테니까. 빨리 기사 올려서 다른 기자들에게 조회수를 뺏기지 않는 게 일단 중요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신문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그 신문사의 총수가 사내 신년사를 통해 "오보여도 괜찮으니 더 빨리, 더 많이 일단 기사를 뽑아내라" 라고 주문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메이저 신문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볶음밥을 비롯한 세상 많은 일들은 사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만 글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개인의 상황이란 게 분명 있고 저마다의 불가피함이란 것 또한 늘 있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글 쓰는 이로서 너무 중한 족쇄를 스스로에게 채우는 것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볶음밥에서 시작된 나의 분노는 인간 사회에 대한 환멸을 지나 그놈의 돈을 만나 연민이 되었다가 결국 의문으로 남았다.


감정의 변화가 이리 잦아지면 좋을 것이 없기에 오늘은 그만 써야겠다.


돈을 받고 쓰는 글이었다면 훨신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 무료의 책임감이란 아무래도 이 정도까지인 듯하다.


모쪼록, 다음번에 볶음밥을 시켜 먹을 땐 꼭 볶은 밥을 먹게 되면 좋겠다.


물론, 다른 집에 주문할 생각이다.





2024. 11. 29.

유독 추운 겨울에 하루키를 읽으며.

레터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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