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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terist Dec 05. 2024

하여간.. XXX 타는 놈들은..

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생각을 하며 산다. 그리고 그중에는 도덕적으로 약간의 흠결이 있는 생각, 살짝 못돼쳐 먹은 생각 등도 물론 당연히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특별히, 그간 내가 해온 흠결 있는 생각 중 한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일련의 생각이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대략 2년 전, 역시 겨울이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나 공동의 규범보다 자신의 알량한 이익을 우선시하는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자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역시 그러하다.


이 아파트 단지는 지하 주차장에만 차를 댈 수 있고 지상에는 주차가 금지되어 있는 그런 아파트인데 모두가 다 지하에 차를 대는(지하 주차장 자리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곳에서 유독 딱 한 대만이 유난을 떨며 지상에, 그것도 어린이 놀이터 근처의 한 스팟에 자신의 차량을 매일 주차하고 있었다(지금도 그러하다). 추측건대, 주차장에 차를 대면 혹 문콕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 같다. 아무튼 관리사무소의 경고문이 처음에는 그 차량 앞유리에 강력접착제로 부착되어 있었다가 이후에는 늘 그저 살포시 끼워져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 관리사무소에서도 그 차량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았을 것이다(분명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기에 규범을 어긴 채 주차되어 있는 그 차량을 볼 때마다 매우 당연스럽게 욕지거리를 내뱉곤 했었다.


하지만 죄 있는 차주에게는 귀가 있어도 죄 없는 차량에는 귀도 없는 법이기에 그 차량은 내가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본인 주인의 몰상식함을 대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볼썽사나운 대변은 급기야 몰상식의 전염을 유발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대충 1년 전, 역시 겨울 즈음의 일이었다. 기존의 몰상식한 차량 뒤편에 새로운 차량이 역시 몰상식한 주차를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총 두 대의 차량이 본인 주인들의 몰상식과 비양심, 파렴치함과 배움의 얕음, 그리고 교양 없음을 뽐내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로운 것은 두 대의 차량이 모두 같은 자동차 제조사의 차량이었다는 점이다. 그 제조사가 한국에서 가장 흔한 현대 기아차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충분히 눈여겨볼 만한 포인트였고 눈썰미 좋고, 몰상식에 대한 민감도가 높은 나는 이 포인트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포인트를 놓치지 않은 대가로 언제부턴가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 하여간... 이 XXX 타는 놈들은... 기본적으로 제정신들이 아니야" (버젼이 다양했는데 조금 순화했다)


꼭 우리 아파트 지상 어린이 놀이터 근처에 주차된 차량을 볼 때만 저런 욕지거리를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저 제조사의 차량은 딱히 희소한 것은 아니기에 나는 길거리 여기저기서 저 제조사의 차량을 쉽게 볼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꽤나 잦은 빈도로 ‘하여간..’ 으로 시작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소설, ‘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 오베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소설 속의 오베는 ‘아우디’ 차량에 대해 이런 태도를 보였는데 내 경우에는 저 제조사가 아우디는 아니었음을 밝혀둔다)


길에서 만난 낯선 XXX 차량이 깜빡이를 켜지 않았다? XXX 차량의 운전이 조금 거칠었다? 어딘가에서 만난 XXX 차량의 주차 상태가 영 삐뚤빼뚤했다? 내 입에서는 어김없이 ‘하여간’이 흘러나왔다. 거의 조건반사에 가까웠다. 나는 어쩌면 저 말을 하고 싶어서 XXX 차량들이 보일 때마다 유독 더 엄격하고 꼼꼼한 잣대를 들이밀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난 그렇게 내 눈에 들어오는 XXX 차량들을 통으로 싸잡아 대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파트에서 두 대의 XXX 차량이 몰상식을 뽐내기 시작한 그 후부터 말이다.


그랬다. 나는 명백하게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색안경을 쓴 채 교통경찰보다도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XXX 차량들을 바라봤고 그 엄격 근엄 진지한 잣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XXX 차량들에게는 냉혹한 일갈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내 차 안에서 창문을 꼭 닫은 채 나 홀로 그랬기에 그들 중 누구도 나의 냉엄한 일갈을 눈치채진 못했겠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간절히 바라건대, 아마도 이런 경험, 그러니까 무엇인가에 섣부른 선입견을 가지고 싸잡아 욕하거나 한 경험이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난 조금 예민하긴 하지만 특별히 인성이 파탄 난 것도 아니고 어쨌든 ‘사회 상규적으로 봤을 때 평범한 보통 사람’의 범주에 아주 낙낙하게 들어가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아마 다들 엇비슷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 대상이 꼭 특정 제조사의 차량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역시나 김여사였구만! 여자들 운전하는 거 보면 어휴 진짜..
하여간.. 공무원 새끼들은 죄다 저런 식이라니까? 어휴 진짜..
하여튼 요즘 것들은 근성도 없고 노력도 안 한다니까? 어휴 진짜..
아무튼 저 지역 놈들이랑은 상종도 말아야 된다니까? 어휴 진짜..


이처럼 하여간 등으로 시작해 어휴 진짜로 끝나는 말들이 광장에서 대놓고 울려 퍼지진 않지만 저마다의 밀실에서는 조곤조곤하게 결코 끊이지 않는 우리 사회이기에 아마 다들 비슷한 경험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XXX 차량을 싸잡아서 안 좋게 바라본 것처럼 무언가를 싸잡아서 좋지 않게 본 경험이 분명 있을 것이다.


연령대로 싸잡고 성별로 싸잡고 직업으로 싸잡고 출신 지역으로 싸잡고 학교로 싸잡고 생긴 걸로 싸잡고. 싸잡을 수 있는 껀덕지가 하나라도 있다면 곧 있을 그 어떤 싸잡힘에 예외란 없는 사회가 우리 사회니까, 그리고 이 글이 특별히 성인군자 모임에게만 공개되는 것은 아니니까 분명 그런 경험들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라고 간절히 바라겠다. 나만 쓰레기일 리는 없으니까..)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다들 대충 비슷비슷하게 무언가를 싸잡고 색안경 낀 채 욕도 좀 하고 그렇게들 산다는 전제하에 말하자면 사실 이건 그렇게까지 막 글러먹은 행동, 대역죄까진 아닐 것이다. (설령 그게 정말 대역죄라 한들 만인이 하는 대역죄가 어찌 대역죄가 될 수 있겠는가)


세상에 사연 없는 무덤 없듯이 이런저런 싸잡음들 역시 하나하나 그 속내를 들어 파다 보면 어쨌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복잡하고 험하고 바쁜 이 세상에서 나의 안전(육체적, 정신적 모두)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충 싸잡아버리기’만큼 쉽고 속 편한 방법은 없기도 한 법이니까, ‘편견 없이 대하라’라는 말이 좋고 옳은 말이란 것을 알긴 하지만 그 좋고 옳은 말이 어쩌면 내 삶에 기스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그렇게 기스가 났을 때 ‘편견 없이 대하세요^^’ 라는 좋은 말을 하던 누군가가 결코 내 삶을 책임져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게 그렇게까지 막 지옥불에 떨어질 만큼 글러먹은 행동은 아마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글러먹은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게 그렇게까지 글러먹은 행동은 아니라는 의미일 뿐, 그게 권장될 만한 행동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멋대로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은 무척 곤란하다. (그러니까 이건 비유하자면 탄산음료를 마시는 것과 비슷한 일일 것이다. 탄산음료를 마시는 게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글러먹고 잘못된 행동은 아니지만 그 누구도 탄산음료를 많이 마시라고 권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좋다 나쁘다 딱 둘로만 나눠야한다면 어쨌든 나쁘다에 해당하는 일이니까)


아무튼, 이게 마치 탄산음료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일이란 것을 내가 깨달은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는데 이 깨달음에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하루였고 마찬가지로 그런 운전이었다. 특별할 것 없던 하루, 특별할 것 없이 늘 한결같이 꽉 막혔던 서부간선도로, 특별할 것 없던 도로 위의 XXX 차량들과 그들에게 여전히 엄격했던 나의 잣대, 특별할 것 없이 평소처럼 예민함을 가득 품은 채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진부한 어휘로 늘상처럼 혼잣욕을 그들에게 내뱉으며 피곤한 운전을 마친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문뜩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근데.. 가만있어 봐... 이래 봤자 결국 내 기분만 나쁘잖아..?’ 라고 말이다.


그랬다. 문뜩 든 저 생각의 꼬리를 잡고 조금 더 공을 들여 생각해 보니 이건 정말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러했다. XXX 차량들을 싸잡아 욕하기 시작한 후로 내 도로 위에서의 시간은 ‘XXX 차량들이 내 눈에 보이는 시간’만큼 아주 분명히 더 불행해졌는데 그에 비해 실질적으로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기분 나빠하고 욕지거리를 혼자 내뱉든 말든 도로 위의 많은 XXX 차량들은 때론 거칠게, 또 때론 정상적으로. 그러니까 여타 다른 제조사의 차량들과 다를 것 하나 없이 그냥 그렇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요동치듯 변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 내 기분뿐이었는데 그 변화의 방향은 늘 좋지 못한 쪽이었고 말이다.


더 생각해 보니 비단 XXX 차량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삶 속에는 XXX 차량에 대한 것 외에도 각양각색의 선입견들이 가득했다. 그 선입견들은 내 삶 곳곳에 마치 지뢰처럼 설치되어 있다가 저마다의 발동 조건이 갖춰졌을 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곤 했는데 그 작동의 결과는 늘 '나의 언짢음'이었다.


그리고 이건 매우 타당한 일이었다. 무언가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행복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 스스로를 해칠 지뢰를 내 삶 곳곳에 내 손으로 깔아 두고, 그 지뢰들을 시도 때도 없이 밟아나가며 절뚝이는 삶을 살아왔던 셈이다.



라는 생각에 이르렀으나 나는 안타깝게도 그러므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겠다라는 결론을 아직 내리지는 못하였다.


‘그래, 그러니까 딱히 불필요한 선입견을 가진 채 세상을 살진 말자’는 결론은 쉽게 뽑을 수 있는 결론이겠으나 이런 마음의 다짐과 관련된 결론들이란 늘, 당장의 결론보다는 결론의 생명력 유지가 중요한 법이기에 이를 최종 결론으로 채택하기에는 아직 아무래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아마 나의 인격 수양이 덜 된 탓일 것이다.


생각은 많고 토해낸 글도 짧지가 않은데 결론에 힘이 없으니 이래저래 송구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조금 뻔뻔하게 한번 더 싸잡아 보자면, 글 쓰는 작자들이란 본래 좀 그런 법 아니겠는가.      



2024. 12. 05.

저 새끼 또 저기다 차 댔네. 라고 생각한 날에.

레터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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