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은 익산 황등비빔밥의 맛(익산 진미식당)
한가한 설 연휴. 추위도 조금은 가신 것 같아서 올해 첫 도보 여행을 떠났다.
이번 여행지인 익산은 내가 살고 있는 정읍과 KTX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10분이면 오고 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도보 여행 종착지로 여러 번 찾아갔던 도시다.
전주-익산, 군산-익산, 김제-익산 이렇게 3번의 도보 여행을 익산에서 마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산역은 나에게 많이 익숙한 공간이 됐다.
이번엔 익산 시내를 한번 걸어보고 싶어 아침 기차를 타고 익산역으로 향했다.
익산역에서 밖으로 나오니 오늘의 목적지인 미륵사지 석탑을 미니멀하게 표현한 세련된 조형물이 서있었다. 미륵사지가 익산의 주요 관광지다 보니 도시 이곳저곳에 미륵사지 석탑 관련 조형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기분 좋게 출발하려는데 미세먼지 주의 경보가 울려서 기분이 좋다 말았다. 가끔 사람들이 “그 긴 거리를 왜 굳이 걸어서 가요?”라고 물으면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재미도 있고 운동을 하니 건강에도 좋잖아요”라고 말하며 건강 핑계를 대는데, 이렇게 미세먼지가 있는 날에도 여행을 떠나는 건 그들에게 비밀로 해야할 것 같다.
오늘의 출발 식당은 익산에서 8km 정도 거리에 있는 황등면에 위치한 진미식당. 점심 먹을 때쯤 도착하기 위해 익산 시내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따뜻한 볕 아래로 걷는 것도 좋고, 가로수 밑으로 걸을 때의 살짝 서늘한 느낌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현재 건축 일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거리를 걸을 때 건축물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이날은 유리 파편이 잔뜩 꽂혀있는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말로 하면 레트로 감성이 있는 아날로그 방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뾰쪽한 유리병으로 담 넘는 도둑놈들을 찌르겠다는 의도보다는 "이 담에는 이런 장치가 되어있으니 찔리기 싫으면 넘지 마세요~"라는 경고의 의미가 더 크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섬뜩한 비주얼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지나가다 저런 담이 보이기만 해도 시선을 돌리곤 했었는데, 요즘은 보기 힘든 광경이다 보니 조금은 정겹게 느껴지네.
익산은 원불교와 관계가 깊은 도시다. 조금 걷다 보니 원광대학교가 나오고 조금 더 걸으니 원불교 요양원이 나온다. 또 그 앞으로는 원불교 중앙총부가 나오고 끝인 줄 알았는데 멀리 원불교 송신탑이 보이는 걸 봐서 원불교 방송국도 주변에 있는 모양이다. 말로만 듣던 원불교 중앙총부 건물 뒷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니 이제야 찻길이 사라지고 시골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 한 대가 지나가기도 좁아 보이는 논두렁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기 시작한다. 아직 겨울이라 풍경이 조금 을씨년스럽기도 하지만, 난 이런 시골길을 걷는 것이 즐겁다. 아무런 자극 없는 고요한 길을 홀로 걷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근심 걱정도 사라져서 마치 명상을 하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조금은 따분함을 느낄 때쯤 길 옆으로 오래된 무궁화호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30분가량을 기찻길 옆 길을 따라 걸어갔더니 철도 위를 지나는 육교가 나왔다. 육교를 건너 내려오는데 황등1길이라고 적힌 도로명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황등면에 도착한 모양이다. 이제야 육회비빔밥이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황등면은 예상대로 아주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이런 시골마을에도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하게 서있는 식당들이 몇 곳 있었는데 모두 비빔밥을 파는 식당이었다. 출발하기전 미리 점찍어둔 비빔밥집으로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입장했다.
익산 황등에는 예로부터 넓은 논에 소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우육회비빔밥이 생겨났다고.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해 허기가 진 상태여서 육회비빔밥을 특으로 빠르게 주문했다. 주문을 하자 다양한 반찬을 아주 깔끔하고 정갈하게 담아 가져다주셨다. 고소한 맛과 아삭한 식감이 좋았던 연근 무침, 간이 세지 않아 담백한 맛이었던 얼갈이배추 무침이 특히 맛있었다.
그리고 등장한 말로만 듣던 황등 육회비빔밥.
황등 육회비빔밥은 스테인리스 대접을 뜨겁게 달궈서 내주는데 식사를 마칠 때까지 비빔밥을 따뜻하게 맛볼 수 있어서 좋다. 돌솥을 달궈서 내주는 비빔밥은 많이 먹어봤지만 이렇게 대접을 달궈서 내주는 건 생소한 스타일이라서 재미있다.
비빔밥 가장 위로는 도토리묵이 올라가 있고 그 밑으로 육회가 넉넉하게 들어간다. 육회 아래로는 얼갈이배추, 당근, 상추, 콩나물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 있고, 밥은 이미 비벼져서 나오는 게 특징. 메뉴판을 자세히 보니 비빔밥이 아니라 비빈밥 으로 표기가 되어있는데 미리 비벼서 내준다고 (미리)비빈밥 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빔밥의 기본 간이 매콤하고 적당히 자극적이어서 내 입맛에 잘 맞았고, 육회와 다양한 야채가 넉넉하게 들어가서 입안이 풍성하게 느껴졌다. 비빔밥에 따라 나오는 선지 뭇국도 맛이 좋았다. 소고기 뭇국 스타일의 국물인데 비빔밥을 먹는 중간중간 매콤한 비빔밥을 구수하게 환기를 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부드럽고 신선한 육회와 다양한 야채가 들어간 매콤한 비빔밥이 잘 어우러져 맛있었던 황등육회비빔밥. 특을 주문해서 양이 푸짐했지만 맛도 있고 배도 고픈 상태여서 금세 한 그릇 뚝딱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고 식당을 나섰다.
육회비빔밥을 배불리 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다음 목적지인 미륵사지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밥도 먹었겠다 힘차게 논두렁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데 갑자기 길이 뚝 끊겨버렸다.
나는 주로 스마트폰 지도를 보면서 여행을 하는데 산길이나 시골길을 다니다 보면 지도에는 있지만 실제론 없어진 길들을 만날 때가 간혹 있다. 길이 없으면 우회해서 가면 되지만 이번엔 도무지 우회할 길도 보이지 않아서 그냥 논으로 내려가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진흙으로 신발은 엉망이 됐지만 뭔가 길을 개척하는 느낌 같은 게 있어서 진짜 모험을 하는 기분이 들어 오히려 즐거워졌다.
논밭을 해치며 걷다가 다시 도로로 올라왔는데 처음 보는 풀씨가 온몸에 잔뜩 달라붙어있었다. 한해살이풀인 도꼬마리 씨앗이었는데 지금까지 만나본 다른 풀씨들에 비해서 훨씬 강력하게 달라붙어 있어서 떼어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 도꼬마리 씨앗을 보고 힌트를 얻어 벨크로가 탄생하게 됐다는데, 벨크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접착력이 세서 신발을 벗어서 옷을 쳐내며 겨우겨우 다 털어냈다.
이런 미물도 자손을 퍼트려 보겠다고 이렇게 열심히 버티는데 나도 인생을 좀 더 치열하게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