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차키스'편
글을 쓰다가 바다나 여인이나 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으면, 나는 가슴속을 들여다보며 내 속의 아이가 하는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그는 나에게 받아쓰라고 글을 불러 주는데, 아쩌다가 어휘를 사용해서 바다와, 여인과, 신의 위대한 힘을 비스하게나마 묘사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 속에 살아있는 아이의 덕분이다. 나는 티없는 눈으로 세계를 항상 새롭게 보기 위해서 또 다시 아이가 된다(주1).
부럽다.
땅을 뚫고 나온 싹을 보다가
밤새 불어닥친 강풍에도 끄떡없이 버틴 가녀린 꽃송이를 보다가
저~ 멀리 뾰족한 산봉우리에 자신의 중심을 내어주고 중턱까지 내려앉은 구름을 보다가
나는 그들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쓰려 하지만 실패한 적이 잦다.
영혼의 탁도와 어휘의 한계때문이다.
글은 영혼의 소리와 진동의 어휘화다.
필력은 영혼의 탁도와 비례한다.
영혼의 탁도는 정신의 질서와 비례하고
정신의 질서는 인식의 무관심과 비례하고
인식의 무관심은 무지의 수용과 비례한다.
결국, 명제 하나.
아이처럼...
아이는 마음대로 그리고 마음대로 쓴다.
상상하는대로 현실로 구현해낼 수 있음을 믿는다.
글을 쓰는 이에게 순수성은 그야말로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다.
순수함은 인간이 꽃을 피우는 것이다. 우리의 천재성, 위대함, 신성함과 같은 것들은 이 순수함의 꽃에서 탄생하는 다양한 열매일 뿐이다. 순수의 수로가 열리면 인간은 그대로 신에게로 흘러간다. 순수함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불순함은 우리를 나락으로 내던진다(주2).
인간을 신에게로 흘려보내는 수로...
하지만,
'순수'라는 단어는 참 묘하다.
순수한데 아는 것이 없으면 백치이고
순수한데 많이 알면 바보처럼 살게 되고
순수하고 많이 알지만 성정(性情)이 모나면 그 주변이 힘들어지고
순수한데 아는 것이 없고 모난 성정이면 나서서 사고치고 사단을 낸다.
하지만
많이 알고 선한 성정이라면 순수는 그야말로 탁월한 경지로 지혜롭다.
아니 어쩌면,
순수해야 많이 알게 되고 선한 성정일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의 명제.
글을 쓰는 이라면 늘 목이 마르다.
어휘때문에, 비유때문에, 논리때문에 늘 목이 탄다.
하지만,
타는 목 축여줄 물이 없는 순간, 순수성은 위태롭다.
순수성이 위태로운 그 순간, 타협과 허영이 잠입한다....
물을 길어 마시려고 우물로 두레박을 내려보낸 목마른 이슬람교도 신비주의자는 누구였던가? 그는 두레박을 끌어올렸다. 거기에는 황금이 가득했다. 그는 황금을 쏟아버렸다. '신이여, 당신이 보물을 잔뜩 소유했다는 사실은 저도 압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마실 물만 주십시오. 저는 목이 마릅니다.' 그는 다시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 마셨다. <말씀>은 그런 것, 장식이 없어야 한다(주1).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영혼의 탁도부터 맑게 해야 한다.
혼탁한 영혼을 구해내기 위해 어린아이를 닮아야 하고
순수함을 되찾는 과정에서 모난 성정은 깎일테고
성정이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지식은 지혜로 승화된다.
그런 글이라면...
장식을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글 자체가 하나의 장식이 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이라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마지막 명제.
순수로부터 배양되고 키워진다.
주1> 월든, 헨리데이빗소로우, 열림원
주2> 영혼의 자서전, 카잔차키스, 열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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