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비스킷 통에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고, 거기에 좋아하는 것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자꾸 먹어 버리면 그 다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안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다 라고, 난 경험으로 그걸 배웠거든요.”
전체적인 스토리와 인물들에 대한 몰입도가 높았던 책이었는데, 다 읽고 나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감정이 며칠이나 여운으로 남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시점에서 왜 이 대사가 생각났을까.
우리 부모님과 내게 좋은 일들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이 살아오신 인생을 나는 곁에서 지켜보고, 들어오면서 자라왔다. 아버지가 겪은 일들과 지금까지의 삶, 어머니가 겪은 일들과 지금까지의 삶. 소풍같은 인생이라는 아버지의 말과 저녁에 술 한 잔을 곁들이던 일상, 항상 응원이 되어 주셨던 모습, 언제나 뒷바라지를 해주셨던 엄마, 부지런함과 고된 노동의 생활, 함께 성당에 가서 켰던 촛불. 부모님이 가정을 이루어 오셨던 시간들, 생활비를 쓰면서 할 수 있었던 저축, 지금의 내가 입고 있는 옷들. 나는 부모님처럼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 이러한 것들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나중에 얼마나 많은 후회와 눈물을 흘리며 삶을 살아가게 될까.
독립을 하고 첫 밤을 맞이했다. 집에서 쓰던 침대가 얼마나 편안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와이파이는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속도가 느렸다. 날씨가 생각보다 더워서 누워있다 일어나 사놓은 드라이버로 선풍기를 해체해 닦은 뒤 강풍으로 틀었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밤새 깨기를 반복했다. 아침이 되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눈을 뜨고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서 살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앞으로 3개월을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지 당장 움직여야만 했다. 일어나서 인터넷 쇼핑을 시작했다. 상의나 하의는 빨래 후에 옷걸이에 걸어 선반에 널어놓으면 되지만 수건이나 속옷을 널어놓을 행거가 필요했다. 장소가 좁으니 미니 행거로 구매했다. 지금 있는 책상은 여러 가지 물품을 쌓아놓고, 세면 바구니를 놓고, 식기 건조대를 놓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식탁이나 노트북을 사용할 책상이 필요하여 침대에 앉아서 사용할 수 있는 높이 조절용 책상을 구매했다. 수건을 아침, 저녁 하루 두 개씩 사용하기에는 빨래가 버거웠다. 스포츠 타월을 구매했다. 빠른 인터넷을 위해 랜선 젠더를 구매했다. 평소 쌓아놓고 먹을 맥반석 계란과 김을 구매했다. 마트에 가서 쓰레기 봉투 규격을 알아보고 5L짜리 미니 휴지통을 구매했다. 다이소에 가서 밥그릇으로 쓸 용기와 반찬용기를 구매하고, 방, 서랍, 신발장 등에 향기를 좋게 해줄 방향제들을 구매했다. 방향제는 몇 번 실패했다.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한 향이 좋은 것 같다. 아침마다 먹을 바나나를 구매했다. 마늘과 오이를 구매해서 다듬고 키친타월을 덮은 용기에 보관했다. 오이 5개가 생각보다 많았다.
자기 관리에 대해서도 조금 더 깔끔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시원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기 때문일까. 초췌한 모습의 내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떻게든 닦고, 닦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자발적 외로움이다. 그리움이다. 부모님과의 생활은 이제 5%, 8% 정도만 남았다는 글이 생각났다. 이제 밖에 나와 살기에 시간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곁에 있던 내 모습을 좋아하셨을까. 우울과 불안, 무력감, 스트레스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독립을 결심하게 되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곳은 회사일 것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곳도 회사일 것이다. 그러나 집에서의 그 작은 영향이 견디기 어려워 나오게 되었다. 돈은 벌어야 하니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매년 힘든 시간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연말이 되면 그 힘듬이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 때 느꼈던 물질적인 고난과 정신적인 고통들이 괴로웠다. 해가 지나도 반복되는 힘듬이 너무도 아팠다. 올해는 그러한 일을 피하고 싶고, 그 때의 감정들로부터 초연해 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동안의 경험과 지혜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고 있지만(독립을 결정한 것도 그러한 방법 중 하나이다), 앞으로의 일은 잘 모르겠다. 당장의 수입을 벌어야 하기에 자발적으로 끊지 못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회사는 이러한 나를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언가시작할 시간을.
나는 리서치 업계에 들어온 것을 후회한다.
직장에서의 커리어 뿐만 아니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쉬는 날이면 불안하고, 술에 취해 있을 때면 불안했다. 내가 즐겨야 할 여가 시간들에 대해서도. 생존의 이유였다.
그렇게라도 그것이라도 벌어야 했을까. 그 정도라도 실력을 키우는게 잘한 것이었을까. 나는 이 분야에 재능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업계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조직사회와 잘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내 재능이 무엇일지 다시 고민해 봐야 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직무는 리서치 연구원 말고 무엇이 있을지, 조직문화는 무엇이 있을지, 조직이 아닌 다른 방향은 무엇이 있을지, 그렇게 지금보다 일로써도 만족하고, 수입에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미래를 위해.
리서치 업을 그만두고 나서 “그래도 그 일이 할만 했었는데”, “그 직장 그냥 다닐걸” 등의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의 나의 마음까지도 돌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라 앞뒤 상황을 모두 잘 고려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이 될 수 있도록.
지금의 소득에 감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그냥 지금 잘 다니면 되지, 나라는 사람이 유별난지도 유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득이 끊어졌을 때의 고통은 기억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신감이 없어지고, 연애는 시작조차 어렵고, 취미생활도 술을 한잔 마시는 것도 어렵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잔뜩 움츠러 들었던 그 생활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의 소득에 감사한다는 것은 그러한 경험에서 나온 생각이기도 하다.
5년이 가까워 가는 시간 동안 일을 하면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리서치를 나온다면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허무함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이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될까. 대기업이나 공기업, 전문직에서 일하는 사람들 또는 기술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일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남들이 쉽게 따라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전문성과 지식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을까. 성취감을 느끼며 일을 하고 있을까.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그 시간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개인의 자존감을 소모시키는 환경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짜 노동이라는 책 제목을 보자마자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잉여를 감추기 위한 가짜 프로젝트, 일찍 간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수행되는 야근, 많은 직원을 거느리고 그들에게 일을 부여하는 것이 관리직에게 지위의 상징이 된다는 것과 관리직은 권력에 더 가깝고 자신을 방어하는데 능숙해서 실무직보다 감축이 적다는 것. 기싸움과 경쟁이 없었다면 실무진이 일을 처리하는데 시간은 얼마 소요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형식주의, 겉치레, 바닥에서 노예처럼 시작해 힘들게 올라가고, 올라갈수록 아래쪽의 노동으로 이득을 취한다는 것, 사람들은동료의 일을 훔치거나 일을 천천히 하거나 딴짓을 한다는 것, 동료를 신뢰하지 않고 확인을 위한 확인을 하면서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것.
이러한 것들과 조직사회에서의 위계, 관계, 네트워크, 경쟁 등의 복잡한 사항들이 겹쳐 가짜 노동은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을 것이다. 업계에서 또 하나 느낀 것은 체계적인 교육이 있었으면 익숙해 지는데 1년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시행착오를 겪고, 업무와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그러한 상황에 따라 허무한 시간들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결국 집에 일찍 가야한다. 집에 일찍 가는 것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진리인 것 같다.
또한, 겉치레하지 않는 것,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는 것, 휴가 때는 쉬는 것, 신뢰하는 것, 경솔한 허위 프로젝트, 회의, 통제 수단을 그만두는 것, 표면적 사고보다 깊은 사고를 촉진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동안의 나의 태도에서도 가짜 노동이 있었을 것이다. 본질적인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겠다. 그릿에서는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모여서 완성된 형태를 이룬다고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완성된 형태를 이루기 위한 것 중 불필요한 동작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삿짐을 다 옮기고 아버지 차를 운전해 본가로 돌아가는데,
괜찮은 집이 있고, 차가 있고,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삶은 꽤 즐거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는 이제 밝고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다. 그동안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드린 것 같아 많이 죄송하다. 반면에, 부모님이 나이가 드셔서 아프신 모습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였다. 이제는 부모님의 그런 모습을 곁에서 볼 수 없으니 그렇게 아프신 것을 들을 수는 있을지 내가 눈치챌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예전에 사우나에 가서 노인 두 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식들에게 아프다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면 짜증만 낸다고. 부모님은 그런 짐을 짊어주고 싶지 않으셔서 운동을 열심히 하신다. 그리고 그동안의 모든 아픔에 대해 당신이 모두 감당해 오셨다. 돈은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집에서 나온 나는 불효자다.
부모님은 3개월이 지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해 주신다. 감사한 일이다. 독립된 삶을 살면서 그래도 3개월 동안은 모아놓은 생활비가 있어 생활이 가능하지만 내년을 살아가기에는 돈이 부족할 것이다. 그 동안에도 핸드폰 요금과 보험료가 고정비로 지출되었지만 이제는 월세와 생활비가 추가된다. 생활비에 대한 걱정을 항상 해야 하고, 그만큼의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투잡을 뛰어야 할 수도 있다. 주체적인 삶이란 자유롭기도 하지만 그만큼 나 자신을 오롯이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취업 준비가 길어져 두 번의 추운 겨울을 겪으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때 1,500원 정도의 매대 앞에서 판매하는 치킨 꼬치를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생활비가 빠듯해서 겨우 사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참 맛있고 즐거웠다. 정규직 취업 이후에도 저축 비율이 높아서 쓸 수 있는 돈이 많지 않으니까 했던 생각이 '치킨이 먹고 싶을 때 치킨을 사 먹을 수 있는 정도로 돈을 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연구소 행정 인턴으로 처음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출근 이후에도 주말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으나,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하셨던 점주님이 생각난다.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리고 나왔었다.
지금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도 문득 그때와 같은 생각을 해본다. 여기서 잘 머무르다가 좋은 직장을 구하든, 공공임대주택을 얻든 더 잘 돼서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리고 나가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