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얼마 전 백발의 할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너에게 재능이 있냐고.
재능.
그야말로 십 대 시절 날 참으로 아프게 했던 말이다. 누군가는 내게 미술을 하지 않으면 그 재능을 썩히게 되어 아까울 거라 했고, 누군가는 내게 공부를 잘한다면 그냥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 정도의 평범함이라 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미대 출신의 화가, 전문가들이었다. 같은 전문가도 이렇게나 의견이 다르다. 대체 예술적 재능이란 무엇이며, 이 재능 유무를 판단하는 건 누구의 몫일까?
어린 시절 나는 그들의 말에 울고 웃으며 아파하고 휘둘렸다. 이십 대의 나는 그 말이 두려워 그림을 거의 그리지 못했고, 타인의 평가가 무서워 결과물을 공개하는 것도 크게 두려워했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 늘 새가 없었다.
솔직히 '재능이 있냐'라고 물었던 백발의 그분이 정의하는 재능이라면, 아마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선천적이라 믿어 의심치 못할 만큼 매사 철학적으로 사고하며, 이를 잘 표현해 낸다. 게다가 그림을 그리는 게 이 세상 그 어떤 행위보다 즐겁고, 그렇기에 긴 시간 몰입해 지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따라서 나에겐 예술적 재능이 있다 믿는다. 예술가란 마르셀 뒤샹 이후 세밀한 표현과 과학적 기법을 통해 화려하게 망막적 미술을 구사하는 장인이 아니다. 미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디자이너도 아니다. 예술가란, 철학가다. 그렇기에 나는 타인이 내 작품에 뭐라 악담을 퍼붓든 개이치 않으려 한다. 물론 타인의 평가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도 사람이기에. 그것도 연약한 정신을 가진. 그렇지만 지금은 내 작품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어 하고 공감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내가 만들어내는 산물의 경중을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국가나 민족은 멸망하나 예술을 멸망치 않으며 역사는 번복하지만 예술의 생명은 영원하니까. 내가 만들어낸 것이 장구한 예술의 한 편에 새겨질지 아니면 아무 의미 없이 홀로 외롭게 세상에 발신한 자기 위로용 쓰레기로 치부될지는 내가 흙과 바람, 자연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 지나야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에 획을 그을만한 유명한 화가가 되어야지, 이런 포부는 없다. 하지만 지금 조금이라도 더 이름을 알리고 싶긴 하다. 그래야 내 감정과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고, 짧은 순간을 사는 내가 그걸 보고 또 나의 작품에 반영하여 빠르게 교감, 그를 통해 아주 조금이라도 나은 작업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야 만족할만한 재료를 사고 질 좋은 공부를 해서 조금이라도 멋진 작품을 만들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예술가인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예술로써.
예술이란 무엇일까. 예술적 재능에 대해 논하려면 이 난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것에 내 인생 모두를 걸기로 다짐한 이후로, 나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예술이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꾸미지 않은 나 자신의 내면을 정체화하여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에 의미가 있고, 그래야 내 작품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진솔하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나를 표현하는 것이 너무나 서툴다. 줄곧 있는 그대로의 나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왔기에, 도무지 습관화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나는 내가 부끄럽지 않은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인간관계를 위해 뒤집어쓰고 있는 페르소나조차 나에겐 너무나 부끄러워 죽고 싶을 정도의 무언가였다. 그러나 그림을 거듭해 그리면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나에게 사고의 변혁을 일으킨다. 그로 인해 인간이란 다채로운 존재이며, 아름답게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한없이 부끄러운 나 또한 충분히 넓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그러니까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아마추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철저하게 전문가의 마음으로 살기로 했다. 아마추어라는 단어 뒤에 숨어 나의 어리숙함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부족한 점은 남은 생(生) 동안 부단히 노력해 메꿔나갈 것이다.
예술이란 실로 멋지다. 나 다운 것이 무엇일까? 예술이란 무엇일까? 논하려고 하면 뭐 잘못 먹었냐 술 취했냐 혹은 오글거린다 새벽 감성이다로 매도하는 세상인데도, 예술 작품을 앞에 두면 모두가 필사적으로 감동의 요소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감동은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을 바꾼다. 정말로 멋지고 값진 분야다. 그렇기에 나는 예술에 내 인생 전부를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