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원래 저마다의 반전드라마 : <절반,푸르다(2018)>
솔직히 반전 서스펜스 같은 거, 굳이 찾아볼 필요 없다. 저마다의 삶은 매순간이 반전이지 않은가. 하다못해 하루종일 맑을 거라는 일기예보를 굳게 믿고 나온날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도 반전이라면 그러하다. 열심히 공부한 시험을 망치는 일, 열심히 뛰어갔지만 간발의 차로 열차를 놓치는 일, 가볍게 떨어트린 핸드폰이 박살나는 일 ... 우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들의 연속 속에서, 마치 왕십리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지하철을 타는 모습처럼 크고 작은 반전들과 어깨를 부딪혀가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꿈을 좇는 소녀
만화가의 꿈을 품고 스무 살에 일본의 기후현에서 도쿄로 상경한지 6년, 짧지 않은 시간을 오롯이 만화에 바친 스즈메. 새하얀 종이 위헤 보기 좋게 나누어진 칸을 검정색 잉크로 채우고 덧그리면서, 요령도 없이 성실하게 한 장 한 장 완성해갔다. 슬슬 결실을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의심이 들 무렵, 정말 데뷔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녀에게는 자격이 있다. 벌써 26주짜리 연속드라마의 절반이 지나갔다. 그만큼 그녀를 지켜봐 온 만큼,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 스즈메가 꿈을 이루길 바랄 뿐이다. 그녀와 함께 만화를 시작한 동료들은 이미 저마다의 사정으로 곁을 떠난지 오래다. 꿈을 이루고, 유명 만화가가 되어 '그런 일도 있었지' '그때 꿈을 좇아 도전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동안의 노력을 회상하며 흐뭇하게 웃는 스즈메를 보며, 함께 미소 짓고 싶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한 시간에 버금가는 이야기들이 앞으로 기다리고 있다. 꿈을 이루고 추억에 잠기는 장면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분량이 아직 남아있다. 단지 절반을 왔을 뿐이다. 원하던 만화가도 됐겠다 이제 뭐가 더 나올지 의문이 들 때, 그녀는 펜을 꺾는다. 첫 데뷔작 이후 차기작이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시간에 쫓겨 마감일까지 완성하지 못한 만화를 제 스승이 대신 그려주면서 스즈메는 이제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데뷔한지 3년, 일편단심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지 10년 째, 이제는 할만큼 한 것 같다. 만화를 사랑하는 소녀의 막이 내린다.
당연한 반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반전인데, 지극히 현실적이다. 오랫동안 꿈꿔온 것이 좌절되는 일,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다. 오히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거쳐온,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일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이미 반전에 익숙해있다. 다만 그걸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반전을 불행으로, 혹은 운수 안좋은 날이라는 표현으로 치환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삶은 결국 반전의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뛰어가는 것 아닌가. 스즈메의 경험은 특출나지 않다. 영원할줄 알았던 소꿉친구와 절연을 하게 된 것, 동료들과 뿔뿔이 흩어진 것, 만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 모두 당연히 있을 법 하다. 제각각의 삶에는 당연히 반전이 있다.
데칼코마니의 원리
색종이의 반쪽에만 물감을 묻히고 접었다 피면, 데칼코마니가 생긴다. 좌우반전을 활용한 데칼코마니는 다시 반으로 접으면 완전히 일치하여 포개진다. 오른쪽에 반전의 물감이 묻는다면, 왼쪽에도 반드시 같은 모양이 생긴다. 만화가의 생활을 접고 스즈메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몇 년만에 헤어졌던 소꿉친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반전은 반전을 불러온다. 하루종일 비가 오다가 내가 나갈 떄 딱 비가 그치는 일, 떨어질 거라고 예상한 시험에 한 문제 차이로 붙는 일, 의외로 다음에 탄 열차가 방금 놓친 것보다 훨씬 쾌적한 일. 20대의 꿈을 포기함으로써 또다른 꿈을 꿀 수 있게 된 스즈메. 우리가 쉽게 불행이라고 부르는 반전은 곧 행운의 대칭이다. 인생에서는 좋은 일도, 예상치 못하게 온다.
일본에서 태어나 만화가를 꿈꾸던 스즈메의 삶은 나와 한톨도 겹치는 게 없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깊이 공감하고, 드라마가 보여주는 40년의 대장정을 끈질기게 지켜볼 수 있는 건 스즈메의 노력이, 눈물이, 웃음이 우리 모두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 좌절하는 마음, 무언가를 포기하더라고 내 안의 가장 중요한 건 지키고 싶은 마음은 같다. 우리는 희망과 실망 사이의 반전, 포기와 도전 사이의 반전을 오가며 계속해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