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곡가 정창원입니다. 일본에서 작곡을 전공했고, 올해부터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2년 1월, 디지털 싱글 앨범을 발표했고, 올해 연말 발매를 목표로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3중주 앨범 작업 중에 있습니다.
매일 하교길에 들리던 피아노 학원, 교복을 입고 레슨 받으러 갔던 선생님 작업실, 낯선 도시의 전철을 타고 통학하던 도쿄 분쿄구의 모교 강의실과 레슨실 그리고 연습실. 저의 10대와 20대는 레슨과 연습, 연습과 레슨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진학을 목표로 하는 어린 학생들과 음악에 뜻을 둔 성인들을 대상으로 레슨을 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레슨을 받으며, 그리고 레슨을 해오며 스스로 대답하지 못한 모순이 있습니다. 정말 레슨을 받으면 작곡을 할 수 있을까? 작곡이 배워서 되는 것일까?
배워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나는 왜 레슨을 받았던 것일까, 가르쳐도 할 수 없는 일을 나는 왜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의 해답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아직 정답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일을 계속해나가기 위해서는 고민을 멈출 수 없습니다.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
1 '작곡을 한다'라는 행위는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음악을 만드는 일'입니다. 하지만 접근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작곡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장르에 따라 작업하는 방식이 달라지기도 하고, 작업자에 따라서 구체적인 접근방식이 또 달라질 것입니다. 같은 작업자라도 작업하는 환경 및 조건에 따라, 또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접근방법은 또 다른 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2 저는 소위 '전통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작곡가입니다. 베토벤이 심각한 표정으로 펜을 쥐고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을 보신 적이 있으시죠? 지금은 사용하는 도구가 펜과 종이에서 컴퓨터로 옮겨 왔지만 아직 저희는 그 시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제반 지식들을 공부합니다. 화성학, 대위법 같은 음악이론은 물론이고 시창・청음, 스코어 리딩(총보독법), 작곡기법 등과 같이 작곡에 직접적으로 활용할 테크닉 훈련 등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서양음악사와 악식론 등 구조와 형식을 파악하기 위한 공부도 해야만 합니다.
3 지금 음대 진학을 목표로 1년 반 동안 저에게 레슨을 받고 있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피아노를 배운 학생입니다. 피아노를 배우며 건반화성을 익혔고, 1년간의 꾸준한 레슨과 본인의 열의 덕에 현재 화성학은 입학시험을 치르기에 충분한 수준입니다. 타고난 절대음감 덕분에 청음 시험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제 작곡 연습만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세도막형식의 피아노곡을 써야 하는데 좀처럼 순탄하게 나아가지 못합니다. 가지고 있는 재능과 지식을 실제 작곡에서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곡을 작곡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4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는 지독한 반복 연습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필드에 나가 프로 뮤지션으로서 활동하기 위해선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해결 방법이 명확하고 이 학생이 얼마나 성실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자의 문제는 한참 동안 저를 고민하게 만드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우선 카피를 시켜봤습니다. 세도막형식부터 (입시에는 불필요하지만)오케스트라 까지 오선지에 똑같이 옮겨적도록 했습니다. 동시에 악곡 분석을 통한 모방을 하도록 지도했습니다. 예로,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제1번의 악곡 분석을 과제로 내어주고 다음 레슨 때 구체적인 분석을 돕습니다. 송폼과 화성 진행, 특징적인 선율의 활용 등을 캐치하고 분석한 내용과 같은 형식으로 작곡하도록 했습니다.
5 일주일 후, 완성하지 못한 채로, 사실 거의 시작도 못한 채로 잔뜩 긴장하여 제 작업실에 온 학생의 얼굴을 보니 죄책감이 가득합니다. 과거의 제 얼굴입니다. 과거의 제 얼굴을 한 제자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시작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는 걸.
작곡가는 무엇을 할까?
1 음악사에서 이름을 남긴 위대한 음악가들,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 작곡가들은 어떻게 작곡을 했을까요? 제 작업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1단계의 일을 하는 것 까지가 ‘작곡’이었을 것입니다. 머릿속에 흘러 다니는 한 토막을 잡거나 피아노 앞에 앉아 이것저것 눌러보며 동기를 끄집어내는 일. 이후 악기 편성과 곡 구조를 건설하고 동기를 발전시켜 나가는 일. 디테일을 채워가며 오선지위에 연필로 점 하나, 선 하나 그어가며 완성하는 일.
2 물론 작곡이 끝나고도 바빴을 것입니다. 카피스트에게 의뢰하거나 여건에 따라 직접 악보를 출판용으로 깨끗하게 사보 하고, 연주자를 섭외하고, 연주 일정을 조율하고, 연주자들을 연습시키고 지휘하는 일까지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3 저는 작곡이 끝나면 컴퓨터(Avid사의 Sibelius 또는 MakeMusic사의 Finale)를 이용하여 출판 또는 연주자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사보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후 과정은 실연주 녹음을 하는지, 미디작업을 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실연주 녹음을 할 예정이라면 연주에 참여하는 기악 파트 연주자들의 인원수에 맞춰 파트보를 만들어 제공합니다. 레코딩 스튜디오를 섭외하고 연주자들의 일정을 조율하여 녹음을 합니다. 미디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DAW(Apple사의 Logic Pro)를 이용하여 가상악기로 음원 작업을 하게 됩니다.
4 여기까지 작업이 완료되면 실제 음원 발매까지 몇 단계의 과정만 더 거치면 됩니다. 우선 믹스와 마스터 작업은 필수로 진행해야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믹스는 기초화장, 마스터는 색조화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믹스와 마스터는 시간이 급박하거나 여건에 따라 직접 하는 경우도 있고, 조금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위해서는 전문 엔지니어에게 의뢰를 하기도 합니다.
5 마스터링까지 완료되면 음원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후에 할 일은 앨범커버를 제작하고 크레딧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최종 정리된 음원과 크레딧을 유통사에 넘기면 음원이 발매됩니다.
6 즉 지금의 작곡가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음원으로 만드는 일’까지 해야 합니다. 가끔 과거의 작곡가들보다 할 일이 늘어서 불만이 들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혼자서 모든 게 가능할 만큼 발전된 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7 문제는 이런 일련의 과정은 레슨으로 배우는데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실전을 가장한 훈련을 예로 들어볼까요? 시스템이 잘 갖춰진 실용음악학원에서 배우는 작곡과 지망생이 1단계의 작업까지 마쳤습니다. 일렉기타 녹음을 위해 학원 측이 제공한 레코딩 룸에서 기타 전공생 친구와 녹음을 진행합니다. 선생들의 지도하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녹음을 잘 마쳤습니다.
8 그대로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필드에 나옵니다. 똑같이 일렉기타를 녹음해야 할 상황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보고 들어온 덕에 수준이 높아져서 학생 수준의 연주자는 성에 차지 않습니다. 전문 연주자를 섭외했습니다. 레코딩 스튜디오도 섭외했고요. 그런데 레코딩 스튜디오는 생각보다 비쌌고 이용 가능한 시간도 여유롭지 않습니다. 섭외한 연주자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경험도 풍부한 프로 뮤지션입니다. 약속된 스튜디오 시간은 맥없이 흘러가고 연주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원활하지 않습니다. 연주자와 엔지니어, 어시스턴트 및 스텝들과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나아가지만 결국 최종 판단은 자신의 몫입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도와줄 선생도 없이 오롯이 혼자입니다.
9 결국 작곡은 혼자 하는 일이지만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협력하여야 하지만 결국 혼자 하는 일입니다. 직접 경험하고 부딪히면서 배워야 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스스로 고민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정답을 발견하기보다는 모르는 것, 알아야 하는 것만 늘어갑니다. 아마 평생을 해도 다 알 수는 없는 세계인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
1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해야 합니다.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힘든 입시가 끝났으니 대학교 가서는 조금 놀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음악가로 사는 삶의 제1 우선순위는 연습이 되어야 합니다. 직업이 작곡가이다 보니 주변 지인들이 대부분 음악계통, 특히 연주자들입니다. 연주자 친구들은 바쁘게 연주활동을 다닙니다. 저는 연주자라는 직업의 주 업무가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대 또는 스튜디오에서 하는 연주는 결과이고 결국 주 업무는 연습입니다. 매일매일이 바쁜 특 S급 연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 년 중 실전 연주를 하는 시간보다 연습하는 시간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주 2회, 두 시간 정도의 연주를 하는 직업 연주자는 일주일에 실연주를 4시간 하지만 연습시간은 최소한 30시간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연습이 주 업무일까요 연주가 주 업무일까요? 기업에서 업무태만은 해고사유입니다.
2 겸손하게 임해야 합니다. 세상은 넓고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하지만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겸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 비교해야 합니다. 한 때 바보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이론만 완벽하게 이해하면 음악이론은 마스터할 수 있을 거야”라고. 교재를 사서 공부하다 보니 어떤 걸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지식이 필요함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다른 지식을 공부하다 보니 또 다른 지식이 필요함을 깨닫는 과정의 연속 속에 살고 있습니다. 결국 음악의 진리를 깨우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정복이 불가능한 영역을 여행하는 모험가의 삶을 지향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턱없이 부족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3 전장에 섰으면 칼을 뽑고 휘둘러야 합니다. 레슨은 가용 가능한 무기를 최대한 많이 획득하고 사용법을 익히는 과정입니다. 결국 직접 사용하는 것은 본인의 몫입니다. 누군가가 대신 휘둘러 줄 수는 없습니다. 저는 곡 작업을 시작할 때 아직까지도 가장 힘든 부분은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시작을 하면 어떻게든 진행시켜 완성을 할 수 있는데, 우선 시작을 하는 것이 참 힘들다고 느낍니다. 한 곡이 일주일 만에 완성됐다고 하면 시작할 때의 고민으로 4, 5일은 쓰는 것 같습니다. 시작은 칼을 뽑고 휘두르는 것과 같습니다.
들뜬 희망으로 '작곡은 즐겁고 행복한 일' 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취미'라고 말씀드리기는 너무 무책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적으로 돈도 많이 들고 해야 할 공부도 많은 괴로운 일입니다. 들인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보상도 지극히 소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곡가들이 오늘도 곡을 쓰고 있습니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 '직업이니까'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건전하고 충실하게 발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철저한 계획과 설계, 복잡한 구조속에서 중심과 주변을 구별하며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가기 위한 공부는 삶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모쪼록 작곡을 공부하시는 (저를 포함하여) 모든 분들이 힘차게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