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요일 Mar 27. 2023

핑크빛 얼굴의 남자를 기억하세요

D-205

⠀“아, 봄냄새”

어제부터 이상하리만치 입술이 트지 않았다. 감기 걸린 코에서는 핑크빛 먼지가 묻어 나왔고, 그 속을 은은히 배어들던 공기는 분명 봄의 체취였다. 틀림없는 작년 이맘때의 습도였다. 올듯 말듯 옹졸히 떨어진 어제의 빗물은 겨울의 허리를 지그시 눌렀고, 오늘 아침은 겉옷 하나가 주인으로부터 방치된 채 조용히 옷장에 머물렀다. 하물며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내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건 분명 봄의 짓이었다. 이제서야 나를 찾아온 3월은 슬며시 작년의 추억을 내밀었고, 약 올리는 듯한 표정을 내비치며 내 앞길에 핑크색 물감을 뿌렸다. 무채색 일상에 질려 있던 인간은 그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함께한 서투른 봄냄새는 나를 회상의 길목으로 이끌었다. 물론 아직은 어설픈 분홍길이었다.


⠀외딴곳에 잠시 붙잡혀 온 지난해의 봄은 생각보다 별 볼일 없었다. 어느 한적한 카페 안을 내리쬐는 주황색 햇빛, 초록 잔디 위 네이비색 셔츠를 입은 남자, 그리고 한강 주변을 뛰노는 아이들과 그 사이에 모자를 푹 눌러 쓴 행인 정도였다. 물론 모두 핑크빛 얼굴이었다. 행여나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을까 싶어 얼굴을 몰래 들춰 봤지만, 모두 미소를 띤 발랄한 사람들이었다. 순간 나는 긴가민가했다. 정녕 작년의 봄은 내게 온통 핑크빛이었을까. 분명 원인 모를 무채색의 감정들이 이맘때쯤 나를 덮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 재작년의 냄새일까. 그러기엔 은근히 먼 기억의 계절이다. 그럼 내 생애의 모든 봄날이 축적되어 자아내는 진득한 향기일까. 그러기엔 다른 계절들이 내 인생을 압도했다. 그저 차디찬 겨울이 끝났음을 우주가 내게 귀띔해 준 것일까, 열등감과 닮은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더 진솔히 느끼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 사실 그 정도로 심각히 고심할 냄새는 아니었다. 아직은 연분홍의 향일 뿐이었다.


⠀객년의 봄에는 남색빛의 한 인간으로 생존해 있었다. 아니, 곧 시들 꽃으로써 나는 찬란히 피어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시한부 방랑자였다. 사형수의 마지막 편지처럼 난 스스로를 향한 위안의 텍스트를 이곳저곳을 떠돌며 구술했다. 물론 그래봤자 창살 안이었다. 틈 사이로 내리쬐는 주황색 햇빛과 분홍색의 편지지는 으레 변색되지 않는 줄로만 알았고, 난 그저 필체의 미세한 차이 정도만 존재할 것으로 생각했다. 흡사 계절의 이치를 망각한 사형수였다. 그렇게 나는 분홍빛과 남색빛 그 언저리의 안색을 지니고 홀로 전국 곳곳을 자유로이 쏘다녔다. 탁한 푸른빛의 바닷물과 그 위를 때리는 빗소리, 모자이크 기법처럼 뿌옇게 다가오는 녹차밭과 무성한 벚꽃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은 틀림없이 핑크색을 띠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올곧지만 희미한 글씨가 나뒹굴었다. 겨울만큼 차갑진 않지만 적당히 선선한 바람에 나부끼는 셔츠는 분명 봄의 착장이었고, 난 그렇게 남색 청바지를 몇 날 며칠이고 입을 줄 알았다. 그러나 편지지는 여행의 막바지에 다다르자마자 끝내 완전히 젖어버렸고, 그 속의 위안들은 희미함을 얻었다. 그렇게 작년의 내 낯빛은 딱 이맘때쯤 핑크색을 잃었다.


⠀애석하게도 여행 내내 나를 졸졸 따라왔던 파란 캐리어는 결국 죽었다. 언뜻 내 핑크빛 마음과 수명이 비슷한 듯했다. 정확히 딱 이맘때쯤 바퀴 두 개가 으스러져 갔고, 나중엔 마치 베이글을 자를 때처럼 바퀴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길바닥에 떨어져 나갔다. 애당초 머리 희끗한 노년의 캐리어였다. 그럼에도 난 그 빌어먹을 짐덩이를 어떻게든 끌고 다녔다. 절연 테이프로 부서진 바퀴를 몇 번이고 감아가며, 알록달록한 세상의 겉면을 거칠게 완주시켰다. 여러 땅이 일궈낸 순결한 먼지들을 온몸으로 어루만지게 한 것이었다. 그렇게 난 파란색 캐리어와 분주히 핑크빛 체취를 밟으러 다녔다. 붉은 동백꽃과 누런 갈대밭, 초록빛 잔디와 연분홍의 벚꽃 나무 곁은 줄곧 네이비색 셔츠를 입은 남자의 차지였다. 봄에만 쐴 수 있는 그 주황색 햇빛, 그 때문에 두 팔의 피부가 셔츠 속에서 은연히 후끈해지던 그 느낌은 분명 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짓이었고, 그에 따른 피해자 혹은 수혜자는 응당 남색빛의 인간이었다. 통증인지 쾌락인지 모를 그 오묘한 느낌, 색으로 표현하자면 주황색과 분홍색이 혼합된 빛깔이 남색의 목구멍을 찌르는 듯한 그런 감각. 바로 그 감각이 오늘 내 입에서 소리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아, 봄냄새.”


⠀객춘은 지금의 내 기억 속에 어설픈 쾌락으로 귀결된다. 공연한 압박감 속에서 스스로에게 선사한 방어 기제는 곧 다가오는 여름을 잊게끔 했고, 잠깐이나마 무채색을 억제했다. 물론 얼굴에 감도는 핑크빛은 그다음 달이 되자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지난해의 봄은 그 이름처럼 다른 계절의 반 토막 정도만을 내게 체취로 남겼다. 그래서인지 기억이 더욱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불안과 무지가 악독하게 활개를 치는 계절을 겨우 버티고 나니, 유채색으로 표현되는 지난날의 온도, 그리고 그 감정이 고스란히 투영된 잠깐의 냄새는 그윽한 추억으로써 내 몸에 잔존했다. 벚꽃처럼 잠깐 피었다 사그라든 그 서투른 봄냄새의 면면에는 분명 설렘이 자리했을 게 뻔하다. 겨울에 찌든 나를 조금이나마 일깨워주러 온 거겠지. 지나간 봄의 추억으로 남색빛 남자에 대한 심정적 동조를 이끌어낸 거겠지. 그럼에도 객춘의 소유주가 오롯이 ‘나’였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작년의 첫 계절은 허황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까. 내 지난 얼굴에 나타난 객춘의 핑크빛은 영속성이 없었으니까. 물론 지금 찾아오는 봄 또한 내 소유가 아니고, 곧 들이닥칠 여름 또한 나의 창살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유보된 핑크빛은 후에 네이비색 셔츠를 입은 남자의 목구멍을 다시 환하게 찌를 것이다. 그럼 난 또 다른 색의 캐리어를 붙잡고 오랫동안 괴롭혀 대겠지. 그렇게 또 몇 개의 바퀴를 부숴 먹겠지. 다음 봄에 있을 캐리어와 내 셔츠의 색깔을 모두가 눈여겨 보기를. 부디 내 책임하에 스스로가 핑크빛 인간으로 생존해 있기를! “아, 봄내음!”

작가의 이전글 파도 소리는 분명 더러운 소음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