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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Oct 28. 2022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기

이르쿠츠크행 

“나 교통사고 났는데… 무릎 재활만 2주다.”

“응? 뭔 소리야? 그 몸으로 가도 되는 거야?"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대꾸한 지원은 여행 시기를 2주만 미루자고 말했다. 보라는 오랜만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번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이 얼마나 힘겹게 성사되었는가. 지원은 최종 합격한 회사도 마다하고 가는 거였고, 보라 또한 2년 동안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가는 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고 날 선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일단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쟤니까. 간신히 이성의 끈을 잡은 보라는 지원에게 최대한 점잖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지원은 천하태평하게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고, 자기는 병원에서 러시아 알파벳인 키릴 문자를 공부할 거라는 둥, 회화 공부를 하겠다는 둥 헛소리 늘어놓고 있었다. 이쯤 되면 보라는 체념한 상태로 변경할 티켓을 알아보는 중이다. 역시나 한 번도 순탄하게 흘러간 적이 없는 지원과의 여행 역사는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었다. 내가 진짜 저 원수랑 또 여행 가나 봐라.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착하는 비행기 티켓이랑 횡단 열차 첫 번째 티켓은 변경 완료했어. 아마, 우리 중간에 바이칼에서 2박 3일 하는 거 때문에 두 번째 티켓은 자리 나면 변경해야 할 거야.”

“응, 수고했어. 근데 러시아어 어려워.”     


통화로 일정 변경을 보고한 보라는 지원의 키릴 문자 공부 현황에 대해 전해 듣고는 기함했다. 나 혼자는 무리야. 너도 공부 좀 해봐, 남는 시간에. 느긋이 병실에서 빈둥대며 말하는 지원의 태도가 보라는 얄미웠다. 내가 남는 시간이 있어 보여? 얼마나 어려운데.. 이를 꽉 문 채 나지막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법한 상태를 읽어낸 지원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니, 영어 쓰자 영어. 영어는 만국의 공용어라고.”

“가면… 네가 의사소통 담당이다.”     

며칠간 인수인계를 몰아서 하는 탓에 보라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낌새를 눈치챈 지원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공유하자고 말하고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 보라는 제자리로 돌아와 업무용 다이어리를 펼쳤다. 두개골이 지끈지끈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랍을 뒤적여 타이레놀을 찾았다.     



이틀 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서 내내 고삐가 풀린 채 신나게 놀던 보라와 지원은 횡단 열차 출발하기 30분 전 가까스로 기차역에 도착하곤 택시 트렁크에서 서둘러 짐을 빼내기 시작했다. 2일 동안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들이 반가워 가져왔던 술과 음식들을 탕진했기 때문에 정작 열차 안에서 먹을 것들이 없어 급하게 장을 보다가 기차 시간을 오해해서 생긴 일이었다.     


“우리 이거 못 싣겠는데? 대체 어디야 여긴. 영어를 쓰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입원할 동안 뭐 했어. 너 러시아어 공부 안 했지?”

“아니, 키릴 문자가 얼마나 상형문자 같은 줄 알아? 헷갈린다고‥."  

   

웅얼대는 지원의 변명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간신히 잠재운 보라는 칸의 맨 앞칸에 있는 역무원에게 손짓 발짓을 하며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역무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러시아어로 대답하였다. 아, 진짜 미치겠네. 보라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생각했다. 영어 할법한 사람을 어디서 찾지. 기차는 출발했고, 그와 동시에 데이터는 터지지 않아서 보라는 이래 저리 휴대폰을 창문 가까이 대며 마지막 희망인 구글 번역기를 열어보려고 했다.     



“나 영어 하는 사람 발견했어. 저 사람이 우리 도와줄 거야.”     


지원은 해맑게 활짝 웃으며 방방 뛰며 달려왔다. 뒤에는 족히 190cm는 되어 보이는 곰 같은 러시아인을 끌고. 그 뒤로 끌려온(?) 3명의 러시아인은 역할분담을 했는지 한 명은 24인치, 28인치 캐리어를 짐칸에 넣어주고, 다른 한 명은 역무원에게서 배급품(컵, 모포, 이불 깔개, 시간표 등)들을 받아와 자리를 정리해주었다. 영어를 할 수 있는 러시아인은 지원에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이용법 대해 설명해 주고 있었다. 보라는 의외로 일사천리로 깔끔하게 진행되어가는 모습에 마른세수하며 후- 긴 호흡을 내뱉었다.   

  

“아 러시아인들 엄청 친절하네. 누가 불친절하대. 이렇게 상냥한데!”     

지원은 매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는 정돈된 이부자리에 팡팡 자리를 털고 앉으며 말했다. 앞으로의 여행이 참으로 걱정이 안 되는 건지, 들뜬 얼굴을 한 지원의 표정을 보곤 보라는 얼떨결에 맞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재밌겠다. 그치, 조금만 더 가면 이제 별 보인대. 여기서 누워서 창밖으로 별 보자 우리. 퍽 낭만적인 소리를 해대었다.      



   

“배고파‥.”

“굿 모닝. 일어났어?”

“우리 어제 뭐 샀지. 기억이 전혀 안 나네. 꺼내볼까.”     


지원이는 열차 칸의 앞쪽으로 가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와 티백을 우려 보라에게 건네었다. 테이블 아래 봉지에서 물만 넣어 먹는 컵 감자 수프, 빵 두 조각에 정체 모를 닭 다리를 두 개를 꺼내 아침상을 차렸다. 잠이 덜 깬 채 식사를 하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흘금흘금 쳐다보며 지나가는 걸 느낀 보라는 눈치 보며 조용히 대화를 시작했다. 이거 한국인들 많이 탄다더니 다 거짓말인가 봐. 동양인은 하나도 안 보이잖아. 지원이는 사람들과 창을 번갈아 봤다. 그러네. 우리 빼고는 다 멀대 같은 러시아인이네. 창밖으로는 하얀 자작나무 군락이 펼쳐졌다. 그제야 어제저녁 우당탕탕 탑승했던 것과는 다르게 서쪽으로 열차가 가며 시차를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조금 실감했다.       


   

“오, 로직 책? 나 줘. 나 이거 할래.”   

  

어제 도움을 주었던 러시아 친구들은 금세 내려버렸다. 지원이는 로직 책을 보라에게 뺏기고, 심심하면 할 것들이란 미명 아래 가져온 책 한 권과, 일기장, 카메라를 차례로 꺼냈다. 데이터 안 터지는 건 실감했으니 이제 2박 3일 동안 문명과 최대한 단절할 때였다. 지원이는 밀린 이 메일들과 여행을 반대하던 부모님과 친구들의 연락을 차례로 떠올렸다. 치료를 중단하고 온 터라 무릎도 약간 시큰한 것 같았지만 뭐, 어쩌겠어. 저질러 버린걸. 애써 모른 체하며 꺼낸 것 중 뭘 먼저 시작할지 고민했다.     


지원은 책을 읽고, 보라는 로직을 하며 각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창밖의 풍경은 두세 시간을 지나도 여전히 하얀 자작나무 숲 그대로였다. 보라는 퇴사 후 제대로 된 휴식을 오랜만에 가져서인지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계속 반복하며 정형화된 패턴을 퍽 만족스러워했다. 이 정도면 거의 사육당하는 수준인데 말이지. 병원에서 이미 질려버린 이 패턴을 또 느껴야 한다니.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지원은 앞칸으로 가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샤워실은 저기고, 식당칸은 여기고. 이래저래 구경하던 지원은 역무원이 쉬는 방문 앞에 붙어 있는 열차 시간표를 발견했다. 오, 그럼 이걸로 정차 시간을 확인할 수 있나 보다. 보니까 10분 이내는 못 내리게 하고, 15분 이상부터는 내릴 수 있게 하는데. 그럼 다음에 바깥공기를 언제 마실 수 있을지 계산을 해보았다. 사진을 찍어온 지원은 자리에 돌아와 장 봐온 걸 스윽 보았다. 이르쿠츠크는 하루 정도 더 가야 하니 적어도 네 끼는 기차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식당칸은 매시간 예약이 꽉 차 있고, 이 이상 라면은 먹고 싶지 않아서 몸이 찌뿌둥하던 참에 불쑥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나가면 좋겠는데. 혼자 뛰어갔다 올까 봐.     


기차에서 나가면 가끔 데이터가 터진다는 걸 발견하고는 다음 정차역에서 역 근처에 있는 마트를 검색해 볼 참이었다. 맥주가 먹고 싶었다. 예민해서 잠을 잘 설치는 터라, 술기운을 빌려 잠을 푹 자고 싶었던 지원은 장 볼 목록을 혼자 고민했다. 맥주 몇 캔, 보라 몫으로 라면 몇 개, 프링글스, 과일, 요구르트, 정어리 캔 정도 사면 되려나.     



“보라야, 비자 부산에서 일했대. 이리 와봐. 진짜 부산에서 찍은 사진 있어.”     

큰 역들을 여럿 지나며 탑승객들이 옆자리를 비워다 채웠다를 반복했다. 지원은 계속해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결국 지원의 의지에 감복한 건지 큰 역을 기점으로 옆자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로 채워졌고, 특유의 넉살로 지원은 새로운 친구들을 보라 앞으로 대령했다. 그중 러시아인 비자는 부산에서 일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부산이 고향인 보라와 말이 잘 통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진 않았지만, 의미가 통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세르게이 아저씨도 새로 사귄 친구였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했지만, 종종 비자가 통역을 해주면 몇 마디 주고받았다.     



“우리 이 상태면 이르쿠츠크에 대한 정보도 없이 도착할 거 같은데, 현지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현지 사람 찬스 써보자. 도착하면 숙소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지루한 열차에서 검색으로 갈 곳을 찾아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데이터 통신 상태로 처참히 실패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비자는 보라와 지원의 첫 번째 도착지인 이르쿠츠크의 현지 사람이었다. 어디를 가면 좋을지, 무얼 먹으면 좋을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비자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하면 직접 반나절 투어를 해주겠다고 선뜻 제안하였다. 이르쿠츠크에 다다랐고, 지원과 보라는 비자와 함께 기차에서 내렸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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